발견할수록 신비롭고 아는 만큼 큰 보물
변화로 나아가는 사람은 희생자가 되거나 희생자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복음의 목표는 우리가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참여하는 선은 도덕적 경주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선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응답하는 선은 희생보다 자비를 행하는 것이며 용서하는 자비와 허용하는 자유로 관계를 살립니다. 용서받은 기쁨은 용서하는 자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하는 만큼만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모방하고 사랑할 것을 강조했지 단지 예수님의 신성만을 예배하도록 강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예배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성프란치스코는 그의 삶에서 이해보다 행동을, 정신보다 가슴을, 지성보다 사랑과 진리와 자비를 더 강조했습니다. “은둔소를 지고 다녀라”하고 하시며 기도를 길 위로, 일상생활의 활동 속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세상 전체가 우리의 수도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문과 희생의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일상의 삶은 포장하고, 증명하고, 자랑하고, 비교하고, 경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나를 발견하게 되면 자신의 등에서 천 근 무게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가볍습니다. 더 이상 그 어떤 이상적인 자아상을 세우거나 지키거나 촉진하지 않아도 양심에 불안을 주거나 해야 할 숙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부담을 주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만듭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는 도덕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바쳐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기에 늘 불안하고 두렵고 쫓기는 듯한 내면에 직면하여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으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찾는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처럼 “당신이 처음부터 여기 계셨거늘 제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창세 28,16) 야곱은 가는 곳마다 그분의 현존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도구적 존재로서 영의 활동을 지고 다니면 더 좋고, 모든 관계에서 그것을 보면 더없이 좋습니다. 이것이 영성 생활의 진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수도원으로 보는 성프란치스코처럼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돌보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본디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것, 하느님의 거울에 비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평생 살아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영원한 그리스도인 것을 알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내어주시는 몸을 받아 모신 우리가 내어주는 몸으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거기에 신성한 실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은 자기를 위하여 특별한 이름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본래 지닌 이름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창조 때 받은 순수한 나의 모습은 나에게서 내가 해방될 때 경험합니다. 나에게서 내가 해방된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나는 내가 중심인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밭에 숨겨진 보물”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마태 13,44) 나를 아는 것이 보물이라고 하기까지 우선 할 일은 내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나를 찾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보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사랑을 최우선으로 하는 영성은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다른 전통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려고 하고 서로 나눌 것도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돕습니다. 머리와 가슴과 몸이 하나로 통합되는 앎은 무엇이 사랑인지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성서와 경험과 전통으로부터 하느님을 아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앎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인식이야말로 낙원을 경험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닌 실재요, 미래가 아닌 현재며, 장소가 아닌 관계이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상태입니다. 새로운 삶은 앎에서 시작됩니다. 앎이 변화의 길로 나가도록 돕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처럼 되어가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인간성에 그리스도의 하느님이 육화하시는 삶처럼 나의 삶도 육화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너와 숨을 쉬는 생명체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필립비 3,8) 영원한 생명은 앎으로부터 옵니다. 알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진실하기, 배운 것을 내버리기, 내려놓고 내려가기, 백기를 들고 항복하기와 타인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필수 항목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어 눈앞의 복을 받으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삶을 배워 그분처럼 변화의 길을 가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앎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앎과 믿음이 아니라면 쓰레기처럼 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