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
성찬례는 말씀 선포에 따른 실천적 행위로써 행동하는 자비가 관계 안에 자리를 잡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몸으로 마련하셨습니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나의 몸이다.” 식탁 둘레에 앉아있는 이들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죄인과 의인의 자리가 아니었고 선행의 보상으로 얻은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차별하거나 제외하는 식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결같은 포옹이었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식탁이었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8-29)
예수께서는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죄인과 의인, 흑인과 백인,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과 부자, 순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배운 사람과 배움이 없는 사람, 등 그 누구도 가르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성찬례 자체가 가톨릭교회에서도 쓸모 있고 순결하고 진정한 신자들을 구별 짓거나 아니면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아 왔습니다. 공존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갈라놓습니다. 나만 챙겨보겠다는 그릇된 생각들이 누군가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거짓 자아는 어릴 때부터 형성되어 온 인과응보와 도덕적 성취를 통해 만들어진 내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 자아가 종교심을 만나면 하느님과 너를 이용하여 나를 중심으로 가치체계를 만들어 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름에 중점을 두고 종교심은 나를 그 중심에 둡니다. 종교심은 율법 준수와 희생을 강조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른 것인가에 만 관심을 두며 도덕적 성취로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지켰느냐? 바쳤느냐? 가 최대 관심사입니다. 사고와 행동의 주체자인 내가 하느님 안에 있는 참 자아를 찾으려면 거짓 자아를 원료로 사용합니다. 처음부터 하느님 안에 있는 나를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법을 모릅니다.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기도문의 수를 많게 하고 희생을 셈하면서 그것을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단순하게 현존하기, 통교하기, 관계 맺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온통 쓸모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거나 못한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참 자아는 필요에 매달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 자체의 질과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성찬례는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합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연결 그 자체로 기도가 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 안에서 너와 나와 피조물을 바라봅니다. “영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에페6,18) 성령을 의식하면서 사물들과의 사랑 어린 합일 안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행동할 때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게 기도입니다. 달리 말하면 관계의 질을 높이는 선을 행함으로써 기도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을 때 나의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성찬례는 내어주는 몸을 받아들여 나를 내어주면서 관계 안에 잉태된 말씀이 출산하는 현장입니다. 부정적이고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긍정적이고 단순하게 관계 안에 선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창조가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육화의 도구로서 살아가는 프란치스칸의 성소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