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교회 공동체 내놓아 그것을 가난한 사람과 나눈 사람입니다.
이것을 볼 때 주님께서 드신 하늘나라 비유를 귀로 듣고 머리로 알고,
영성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한 사도입니다.
역사적으로 성인들은 대개 이랬습니다.
안토니오 아빠스가 그렇게 했고,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말할 것도 없으며,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인 김익진 선생님도 그랬습니다.
얼마 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위한 답사 차원에서 목포 북교동 성당에 갔을 때
김우진 극작가를 기리는 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기념 건물도 있음을 봤습니다.
김우진 극작가는 김익진 선생의 형인데 부모가 대단한 부자였기에
두 분 다 일본 유학도 하였는데 형 김우진은 극작가가 되고
‘사의 찬미’로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과 사랑에 빠져 현해탄에서 동반 투신한 반면
김익진 선생은 사회주의에 경도되기도 했고 모택동의 홍군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성 프란치스코에게 감명받아 세례받은 후 복음 말씀대로 자기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을 모두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 재속프란치스칸이지요.
그러니까 바르나바 사도와 김익진 선생의 전 재산 포기와 나눔은
영성 또는 정신이 영성 생활로 이어진 사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삶은 착한 심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전 재산의 포기와 나눔과 같이 전적인 투신은 착한 심성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늘 바르나바 사도와 같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해야지 가능한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영성 또는 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만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살게 되는 것은 성령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가난 정신 또는 영성을 머리로 이해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기에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욕심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에 그치지
그 이상으로 할 수는 곧 자기 것이 아니니 다 포기하고 나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 가난 하나만 본 것이고 수도 서약의 다른 것들
곧 순종과 정결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지 않으면 자기 의지의 완전한 포기인 완전한 순종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결은 더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착을 어떻게 끊을 수 있습니까?
더 큰 사랑 곧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작은 사랑들을 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늦잠을 자서 이 정도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