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는 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까요?
이 축일을 지내며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안 이상 축하해주러?
아니면 오히려 마리아가 축하받으러?
엘리사벳이 늙은이인데다 몸도 무거워졌기에?
엘리사벳의 임신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리 없고
복음도 이런 하찮은 이유로 마리아의 방문 사실을 전할 리 없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하느님 구원 역사의 그 시작.
그렇습니다. 그 시작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는 성전에서 봉헌되신 주님을 받아안고 시메온이 바친 찬미가와 같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하느님께서 인류를 찾아오신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리아를 엘리사벳이 그리고 주님을 요한이
찾아뵈러 오는 것이 마땅한 것 같지만 세상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주님께서 오신 것처럼 마리아도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겁니다.
세상 권력의 관점에서는 약자가 권력자를 찾아가는 것이 보통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또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도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망극하고 당황하여 말하지요.
그러나 하느님 나라 구원의 관점에서는 반대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주님께서 내려오시듯
구원이 이루어져야 할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특히 필요한 육화의 의미입니다.
옛날의 육화는 내려옴과 같아짐의 의미가 중요했다면
요즘의 육화는 찾아감과 다가감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기주의적 개인주의 시대에 외로움이 비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서로가 너무도 두려운 ‘혼족’, 곧 ‘혼밥’ ‘혼술’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찾아가 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는 것,
누구도 다가가길 꺼리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육화요 구원의 방문이며 마리아의 방문입니다.
이것을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에 배우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리아인 내가 찾아가고 다가가야 할 나의 엘리사벳은 내 주위의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과 도전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