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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껴안은 성 프란치스코(1668)

   가 :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

   기 : 캠퍼스 유채, 277X181cm
소재지 : 스페인 세비야 미술관



    이달 초 영국 대영 박물관에선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작품을 모아 특별전을 기획했으며 해외에서 참석할 수 없는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줌(Zoom) 형태의 전시도 마련했다.



국립 박물관으로서 중세 한 종교인에 대한 특별전을 준비한다는 자체가 예외적인 면이 있는데, 이 전시를 준비한 박물관 측은 다음과 같은 이 전시 준비의 이유를 설명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삶으로 보여준 영적 삶에의 순수한 갈망, 가난한 이웃에 대한 실천적 관심, 하느님과 자연에 대해 순수하면서도 열렬한 사랑, 평화에 대한 갈망과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더 없이 열린 대화의 자세 등은 현대 세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기획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것은 좀 예외적인 면이 있는데, 보통 종교가 세상에 대해 자신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보통인데, 이제 인문학적인 차원에서 사회가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가치를 천명하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은 참 획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지난 세계 영국이 낳은 세계적 석학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 박사가 그의 대표적 저작인“ 역사의 연구”에서 바로 이점을 비슷한 방법으로 이미 강조한 바 있다.



토인비는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역사가 가운데 근세가 이해하는 폭넓은 동서양을 수용하는 차원에서 역사서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인류 역사에서 빛을 던진 세 명의 위인으로 석가와 예수,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를 제시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된 인간이란 것이었다.



 아무튼 세계적인 석학인 토인비 역시 온 인류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처럼 성 프란치스코를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우리들은 프란치스코를 “만민의 형제”라고 부르면서 그가 모든 인류를 다 포용했다고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지와 옹졸함을 보이는 반면 토인비 박사는 역사 인문학적인 차원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존재성을 제시한 것은 참으로 대단하며 획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본인은 오늘, 이 작품 해설을 교회적 차원을 넘어 토인비 박사나 대영 박물관이 제시하는 오늘 세상의 혼돈 가운데 빛을 던질 수 있는 위인의 차원에서 이 작품을 해석하고자 한다.



이 작품의 작가인 무리요는 17세기 스페인에서 활동한 미술가이다.

작가 당시 스페인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갈라지고 큰 혼돈에 빠진 가톨릭교회를 지키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종교재판을 실시하고, 신자들의 종교 생활을 감시하면서 조금이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벗어난 것은 이단으로 처벌했기에 스페인에서는 개신교나 아니면 유대인들이 발붙일 데가 없었기에 가톨릭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교회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참으로 잔인하고 비 복음적인 처신이 많았으며 이번 세기를 시작하면서 교황이 온 세계를 향해 용서를 청해야 할 만큼 안타깝고 야만적인 면이 있었다.



작가는 예술가로서 역량 이전에 참으로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잘 무장된 건강한 신앙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프란치스코 재속 회원으로서 프란치스칸 정신을 자기 작품을 통해 표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프란치스코에 대한 여러 작품을 많이 남겼다.



사실 작가의 활동 시기 당시 교회는 부패의 아픔이 많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이 부패에서 해방될 수 있는 모범 성인으로서 프란치스코를 등장시켜 작가뿐 아니라 엘 그레코 같은 작가까지 프란치스코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묵상에 잠긴 프란치스코, 어려운 시련의 순간에 천사들의 위로를 받는 프란치스코 등 프란치스코에 대한 여러 연작을 남기면서 성 프란치스코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했는데 이 작품은 프란치스코의 삶 전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 생애의 어떤 사건을 조명하는 게 아니라 프란치스코 삶의 전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생전에 그는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여”라는 기도를 자주 바쳤고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삶 전체를 인도하던 것이었는데, 이 작품은 바로 프란치스코가 예수님 생애에서 가장 감동하였던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성격적으로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이 지닌 예민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의 가르침보다 그의 실천,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십자가 사건에 큰 감동을 하였으며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십자가를 떠나서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십자가에 매혹된 삶을 사셨다.



그래서 그는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십자가와 깊이 연관된 삶을 사셨다.



그러기에 이 작품에서 프란치스코를 마치 십자가 곁을 지켰던 성모님이나 사도 요한과 같은 수준으로 프란치스코를 등장시키고 있다.



프란치스코 전기 작가인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살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향락은 그에게는 하나의 십자가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갔기 때문이다.”(첼라노 2생애 211)



그러기에 그가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은 어떤 자기중심적인 묵상 주제가 아니라 주님과 깊은 일치와 합일이라는 의미성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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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가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님이 떨어트린 오른팔을 잡고 있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 처참한 형태가 보통인데, 여기에 예수님은 너무 평온하시다.

예수님의 몸 역시 처참한 고통을 겪었던 사람 같지 않게 옆구리에 창으로 찔린 상처 외에는 안정된 몸이다.



머리에 쓰신 가시관 역시 고통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어둡게 처리해서 잘 보이지 않음으로 프란치스코와 예수님이 고통이라는 공통점이 아닌 사랑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난 연인과 같은 친한 친구와 같은 모습이다.



작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의 궁극점은 영웅적인 고통이 아닌 인간의 극진하고 순수한 사랑의 실천임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프란치스코와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손을 잡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자칫 십자가의 고통과 희생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신앙이 광신에 빠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관점은 너무 아름다운 것이며 숭고하다는 관점으로 이 작품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가톨릭 국가에서 사순절 성금요일에 산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공경하는 관습은 열심의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리스도 고통의 궁극적 모습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데 작가는 이런 면에서 대단한 성숙한 신앙인의 모델로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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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작품의 핵심적 교훈을 고통스러운 면이 아닌 평온한 방법으로 제시하면서 핵심적인 오른쪽 천사들이 들고 있는 성서를 통해 이 작품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성서는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인데, 성 프란치스코가 삶으로 실천했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고통에 대한 감상적 동경이나 아니면 사랑에 대한 입에 발린 찬사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 주님 말씀을 실천해야 하고 여기에는 많은 과감한 포기가 따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가 오른손으로 주님을 잡고 있는 것과 함께 오른발로 어두운 색깔을 둥근 공을 밟고 있는데,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포기했던 현세적 모든 안락이나 풍요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성 프란치스코가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오른발로 세상적인 것을 포기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고 싶은 제자의 기본 조건은 세상 것에 대한 과감한 포기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설명하면서 여러 표현을 많이 하나 결국 그의 가난은 이런 세상 것에 대한 포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른팔로 그리스도를 안은 그가 오른발로서 세상 적인 것을 포기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실천이 병행하는 삶이 되어야 하고 이 실천에는 어떤 때 인간적인 아픔을 동반하는 과감한 결단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그가 받을 수 있는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



그는 가르침에서 재산이란 것은 그것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까지 보관한 것에 불과하기에 크리스천은 재물의 주인이 아닌 재물의 관리인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치신 것을 자기 출가의 순간에 실천했다.



또한 그는 자식 사랑과 아내 사랑이 대단했던 아버지, 즉 아들 바보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안락한 가정이 주는 따스함을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다 포기했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당시 상인 계급은 돈은 많으나 권력을 가지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당시 상인 계급으로 권력을 쥘 수 있는 것은 기사가 되는 것이기에 프란치스코가 기사가 되길 권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려한 갑옷을 입고 페루지아와의 전쟁에 출전하기도 했다.

이런 허황한 꿈에 들뜬 그에게 꿈에 나타난 천사는 프란치스코에게 “너는 왜 대왕의 기사가 되길 원치 않고 하찮은 세상의 기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꿈을 꾼 후 기사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가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기사의 삶을 시작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가르침 속에 기사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기사, 세상의 관점과 전혀 다른 포기의 결단과 용기를 언제나 표현할 수 있는 기사의 모습을 강조했다.



앞에서 거론한대로 작가는 프란치스코 재속 회원으로서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세상과 가정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것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았기에 그의 작품은 성화나 풍속화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은 삶의 활력소이며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삶의 불행이나 을씨년스러움이 아니고 하느님 안에서 처리하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참 행복이라는 것을 풍속화를 통해서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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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상 삶의 현실을 그린 풍속화 중 많은 것이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도 비참한 가난한 사람들의 묘사가 여유 있는 기쁨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거지 노인, 수박 먹는 가난한 길거리 소년, 과일 장수 남매와 같은 인생의 밑바닥을 살고 있는 인간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 길거리에서 부랑하는 거지 소년이 어디서 받은 포도와 참외를 맛있게 먹고 있다.

이들은 과일의 맛을 즐기는 것으로 삶의 모든 시름을 이기고 더없이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천국의 기쁨이나 영혼의 기쁨이란 말을 너무 공상적인 차원에서 사용하면 현실적으로 아무 감동도 줄 수 없는 허황한 말장난에 머물기 쉬우며 이것이 오늘도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허구적 종교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년들처럼 과일 하나 반듯이 먹으며 만족하는 모습은 잠시나마 실재적인 천국의 표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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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매로 보이는 길거리 행상을 마친 소녀와 소년이 과일 바구니를 두고 그날 수입인 동정을 헤아리고 있다.



이들이 길거리에서 겪은 하루의 일과는 그리 편치 않은 것이었으나 이 남매는 손에 들고 있는 동전을 바라보면서 그날의 모든 수고와 어려움을 잊고 흐뭇해하는 모습은 성서에 등장하는 잃었던 동전을 찾아 기뻐하는 과부의 비유와 같다.

이처럼 작가가 남긴 많은 풍속화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엔 실패한 인간들도 주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마치 성 프란치스코가 자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함으로써 가난하게 되었으나 이것을 통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둘 사이의 우정에 의해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누리지 못한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신 것처럼 세상의 버림받은 신분의 사람들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행복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성덕이란 수도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실감 나게 전하는 설득력 있는 좋은 교훈으로 볼 수 있다.



오늘 예수회 출신의 교황님이 프란치스코의 영성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이것은 크리스천만이 아니라 기후 재앙 전쟁과 같은 위기에 처한 인류 전체에게 관심과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현실에서 몇백 년 전 프란치스칸 작가의 작품을 통해 현대가 강조하고 있는 경제성장이 곧 행복과 직결된다는 암시가 곧 허구라는 것을 알리는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다.



필자는 프란치스칸으로서 현대가 이렇게 프란치스코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인간적인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성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의 제자로 산다는 프란치스칸들은 같지 않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다.



프란치스칸으로서 본인은 성 프란치스코가 이 시대 반짝 관심을 끌다 사라진 성인이 아니길 바라면서 성서의 가르침으로 이 현상을 끝내기보다 아놀드 토인비의 견해로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인간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 성공의 절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고,
역사적 실패의 절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자만자족적인 안도감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그는 인류 역사에서 문명과 문화는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 환경적으로 열악한 곳에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찬란한 문명이 탄생하는 반면, 너무도 살기 좋은 이상적인 환경의 인간들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없기에 문명의 발달을 이루지 못한 야만인 빈곤한 처지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예수님 성 프란치스코와 역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전문가인 토인비 학설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이 작품의 핵심인 천사들이 들고 있는 성서의 말씀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사람답게 사는 길의 지름길이며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위대함은 바로 자기 삶에 있었던 범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감한 포기와 선택의 삶을 산 데 있으며 이것은 몇백 년 후 인간 역사를 실재적으로 정리했던 역사가 토인비의 견해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되었다.



또한 오늘 대영박물관이 프란치스코의 작품을 모아 특별 전시회를 연 것은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견해로서 성 프란치스코는 작가의 시대처럼 오늘도 이 시대의 변혁을 위해 꼭 필요한 위인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토인비의 견해처럼 종교 안에 머문 존재가 아닌 위기의 세상에 빛을 던질 수 있는 종교적 성인의 경지를 벗어난 세기의 위인이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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