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열려라 참깨!
이렇게 말로 주문을 외면 하느님 나라 문이 열리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어제 오늘 새터민을 위한 김장을 합니다.
어제 김장 준비를 하면서 자매님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은 것들이 가만히 앉아서 나이 먹은 어머니를 시켜먹는답니다.
“엄마, 물!” 이런 식이지요.
일생 그렇게 엄마를 시켜먹고 엄마는 들어주었습니다.
엄마도 어떤 때는 약이 올라 한 마디 하려다가
“어디 장가들고서도 그러나 보자.”하고 참는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도 그러지 않은가 반성합니다.
말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며 극존칭의 청원을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다 주님을 종 부려먹듯 시켜먹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그저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 소원 뒤치다꺼리나 하는 분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종으로서 내 할 바를 할 때
하느님께서 당신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빈 말로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이 실제로 우리의 주(主)가 되지 못하고
우리의 객(客)이 되실 뿐이며,
이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서 날라가 버립니다.
주인이 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3인칭 또는 객관적(客觀的)으로 계셔선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하지만 객(客)으로 계신다면
“하느님? 그분 호주에 계셔.” 뭐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만 어디에 객관적으로 계셔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시고
그래서 나도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산다면
하느님 나라는 나에게 도래하지 않고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2인칭, 나의 당신으로 우리에게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오시면 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탄생하실 때
베틀레헴의 여관집 주인처럼
“이 세상에 오시기는 오시는데
나에게는 오지 마시고
저기 헛간이나 마구간으로나 가슈!”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열려라 참깨!
이렇게 말로 주문을 외면 하느님 나라 문이 열리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어제 오늘 새터민을 위한 김장을 합니다.
어제 김장 준비를 하면서 자매님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은 것들이 가만히 앉아서 나이 먹은 어머니를 시켜먹는답니다.
“엄마, 물!” 이런 식이지요.
일생 그렇게 엄마를 시켜먹고 엄마는 들어주었습니다.
엄마도 어떤 때는 약이 올라 한 마디 하려다가
“어디 장가들고서도 그러나 보자.”하고 참는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도 그러지 않은가 반성합니다.
말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며 극존칭의 청원을 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다 주님을 종 부려먹듯 시켜먹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그저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 소원 뒤치다꺼리나 하는 분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시고 그래서 그분의 종으로서 내 할 바를 할 때
하느님께서 당신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빈 말로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이 실제로 우리의 주(主)가 되지 못하고
우리의 객(客)이 되실 뿐이며,
이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서 날라가 버립니다.
주인이 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3인칭 또는 객관적(客觀的)으로 계셔선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하지만 객(客)으로 계신다면
“하느님? 그분 호주에 계셔.” 뭐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만 어디에 객관적으로 계셔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시고
그래서 나도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산다면
하느님 나라는 나에게 도래하지 않고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2인칭, 나의 당신으로 우리에게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오시면 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탄생하실 때
베틀레헴의 여관집 주인처럼
“이 세상에 오시기는 오시는데
나에게는 오지 마시고
저기 헛간이나 마구간으로나 가슈!”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과 종과 객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사실은 저도 종으로 살기가 무척이나 싫습니다..^^;
저는 늘 헛되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갑니다.
제가 진정 종으로 살지못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저의 주님이 되실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종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종이 없는 주님은 허상일 것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요즘 더욱 절실히 깨닫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종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살아낼 수 있는 곳이라는 것...
종의 정신이 기초가 되지않는 한, 바른 관계의 회복이나 평화를 위한
그 어떤 노력도 모두가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청소 하고 기달려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