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름과 관련한 세 가지 경우에 대한 얘기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스스로 따르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 장사를 치루고 따르겠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장사는 죽은 이가 치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가족에게 인사하고 따르겠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을 결국 따르게 되었는지
오늘 복음에서는 그 결과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진지하게 이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반대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르지 않겠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 따르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지금 바로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 가시밭길이어도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죽음까지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성찰을 하니
하루를 시작하는 이 새벽 참으로 슬픕니다.
40년 가까이 수도생활 한 것이
헛짓을 하고 허송세월 한 것 같아 슬픕니다.
주님은 저 앞에 가시어 가물가물한데
저만 혼자 한참 뒤처져 갈 길 아득하니 외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을 따름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방자하지 않고 겸손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소풍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들떠서 가지 않고 인내와 열정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말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스스로 따르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 장사를 치루고 따르겠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장사는 죽은 이가 치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가족에게 인사하고 따르겠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예수님을 결국 따르게 되었는지
오늘 복음에서는 그 결과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진지하게 이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반대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르지 않겠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 따르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지금 바로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 가시밭길이어도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죽음까지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성찰을 하니
하루를 시작하는 이 새벽 참으로 슬픕니다.
40년 가까이 수도생활 한 것이
헛짓을 하고 허송세월 한 것 같아 슬픕니다.
주님은 저 앞에 가시어 가물가물한데
저만 혼자 한참 뒤처져 갈 길 아득하니 외롭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을 따름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방자하지 않고 겸손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소풍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들떠서 가지 않고 인내와 열정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은 말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
이 아침 묵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