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6장에서 5천 명을 먹인 기적에 이어
4천 명을 먹이시는 8장의 얘기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다른 복음에 없는 얘기를 마르코 복음은 왜 또 하는가?
다른 복음에 없다면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닌 것이 아닌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면 이걸 전하는 어떤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두 사건은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5천 명 먹일 때는 제자들이 굶주린 이들의 아픔을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냐고 주님께 문제 제기하는데
오늘은 백성들의 굶주림에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먹이고자 하는 주님께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냐고도 합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보며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첫째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 반성입니다.
둘째는 그래서 그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는 점입니다.
5천 명 기적 때는 굶주리는 이웃에 대해 걱정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위해 뭘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며 청원 기도를 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래서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도 뭔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들어 알고는 있어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먼 곳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가까운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에게 라자로가 그렇게 가까이 곧 자기 집 문간에 있어도 무관심과
무관계였던 것처럼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그들의 문제이고 하느님의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불신의 문제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먹일 일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냐며 발뺌하려고 합니다.
발뺌이란 아예 그 문제에는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 자기들을 통해 그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을 불신한 셈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실 때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을 가지고 다 먹이셨는데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냐며 자기들은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주님이라고 할 수 있겠냐는 식으로 불신의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싫으면 하느님도 하기 싫어하실까요?
내가 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못하실까요?
그러고 보면 사랑 없음이 맨 밑바탕에 있습니다.
사랑 없음이 아무것도 할 의욕 없음이 되고,
의욕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느님께라도 믿음을 두고 청하는 것조차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누가 하느냐고요?
우리는 그 답을 압니다.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때 도구 될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