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 못마땅한 심사가 잘 드러나는 표현이 ‘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표현보다 그들의 심사를 더 잘 드러내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분’도 ‘저 사람’도 아닌 ‘저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사를 실감 나게 드러내는 번역을 제가 한다면
‘저자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번역함이 좋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라면 주님을 절대 그렇게 지칭하거나 번역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지칭하고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가요?
자기들이 지닐 수 없는 지혜를 주님께서 지니고 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향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보겠습니다.
우선 그들은 인간적으로 자기들은 그대로인 데 반해
주님께서 일취월장(日就月將)하신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에
겸손하게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부족을 인정하지 못했고,
교만하게 주님의 지혜로움과 능력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잘못이라면 신앙적인 잘못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봤기에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는 것임을 봤다면
그것이 하느님께 온 것임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 곧 초월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어야만
하느님 나라의 그 영적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 동네나 누구의 친척 같은 것을 고집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없으며 용은 결코 개천에서 날 수 없겠지요.
같은 식으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는 없고
자기 동네에 오셔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같은 식으로 나와 오래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고,
나와 늘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도 같이 계심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나만 있는 것이고 나만 있어야 합니까?
그에게 하느님은 안 계시고 하느님이 함께 계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와 늘 함께 있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고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고,
고향 사람들에게는 고향 사람일 뿐이고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부터 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보도록 하십시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