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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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루카 2,41-42)
예수님의 겸손은 당신의 신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해마다 파스카 축제 기간에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찾으신 것은 그분의 겸손을 보여 줍니다.
함께 모여 하느님께 영적 제사의 봉헌물을 바치고,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마음을 많은 눈물과 기도로 자신들에게 돌리려 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 사람으로 태어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일러 주신 바,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인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바를 매사에 지켜야 함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고자, 당신께서 친히 내리신 법을 몸소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본을 따릅시다.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바라봄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하늘에 있는 그분의 영원한 집에 머물기를 바랍니다(시편 27,4 참조).
주님의 뜻을 알아보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서 보호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사악함의 바람에 영원히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님의 집인 오늘의 교회에 자주 드나들며 순결한 청원의 제물을 바칩시다.
-존자 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우리는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열매를 충실하게 맺으며 그 나라 안에 머물고, 그 나라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제자리에 있는, 곧 하느님 안에 있는 만물을 만나고, 처음으로 만물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내버려 두었던 사물을 원초적인 상태로 재발견한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 이르되, 거기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소용돌이치면서 계속해서 나아간다. “가서 열매를 맺어라”고 한 요한 사도의 말처럼, 사물도, 지식도, 일도, 원수와 고난도, 이 세계도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자유는 너무나 철저하고, 너무나 뿌리 깊고 포도나무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 때문에 마음이 너무 쉽게 산란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영에게 헤살을 부리고, 영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장애물은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우리의 태도뿐이다.
그것은 버리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려 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 자세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다.(415)


<금주간 성서 읽기> 로마 1-7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궁극적 실재로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진다
존 힉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과 사유는 역사적 . 문화적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 더 본질적으로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해석학적으로 의존적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존 힉의 종교 신학은 인식론적으로는 칸트의 인식론 위에, 역사 실재관에서는 트로이웰취(1865-1923)의 ‘역사적 상대주의' , 곧 종교적 가르침을 포함하여 역사속에 출현한 모든 이념 . 가치 . 조직 체계는 역사적 상대성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 위에 정초하고 있는 것이다.
존 힉의 ‘신 중심 모델'이 말하려던 핵심은, 인간이 ‘신적 실재'의 무궁성을 완전하게 그리고 더 이상 신비할 것이 없을 만큼 온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한계성이나 상대성을 지적하려는 것이지만, 작은 붓 대롱으로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고 우기는 독단이 잘못이지 작은 붓 대롱으로 본 하늘 역시 분명 한 하늘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은 존 힉의 잘못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인식과 체험이 지닌 ‘상대적 절대성' 이라는 역설을 충분하게 담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 존 힉의 ‘신 중심적 모델' 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종교 통합내지 종교 습합의 이론적 토대로 곡해되어 개별 종교가 지니는 고유한 특정을 약화시키고 다양한 종교 전통이 지닌 공약 불가한 요소들을 무시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전통 기독교 보수 교단 측에서는 ‘종교 다원론은 곧 종교 혼합주의"라고 단정하면서 , 종교 다원론의 담론 차체를 경계하거나 무조건 적대시하는 비지성적 태도를 견지하며 대중을 오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성숙한 종교 다원론을 둘러싼 담론은 ‘종교적 배타주의' 못지 않게 무책임한 ‘종교 혼합주의'를 경계한다.(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