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앞에서
새벽 물안개가 호수 위를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어깨 위에는 지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밤은 단지 노동의 실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마음조차 건져 올리지 못하는 밤을 살아갑니다. 애써 붙들었던 믿음도, 사랑도, 충성도 허기진 그물처럼 텅 빈 채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호숫가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슬픔과 실패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계셨습니다. 따뜻한 불빛 위에는 생선과 빵이 올려져 있었고, 밤새 실패한 이들을 위해 조용히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인간은 실패한 사람에게 먼저 이유를 묻고 책임을 따지지만, 주님은 먼저 밥을 차려주십니다. 사랑은 심문보다 먼저 사람을 먹이는 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숯불 냄새를 맡는 순간 오래된 기억 속으로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대사제 집 뜰 안에서 차가운 손을 녹이던 그 밤의 숯불. 사람들의 눈길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 복음서 안에서 숯불은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배신의 자리였고, 또 한 번은 용서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은 상처를 피해 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하느님은 그 자리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군중 앞에서 꾸짖지 않으시고, 새벽 호숫가의 조용한 숯불 앞에 앉히십니다. 그리고 마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듯 천천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칼날이 아니라 손길이었습니다.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었습니다. 주님은 배신의 기억을 다시 들추어 베드로를 무너뜨리려 하신 것이 아니라,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세 번의 부인을 씻어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슬퍼집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한때는 누구보다 큰소리치며 “모두 떨어져 나가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지만, 인간의 의지는 두려움 앞에서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그는 이미 자신의 눈물로 배웠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결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길 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 고백은 실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기도입니다. 자신의 약함까지 다 아시는 분 앞에 더 이상 숨지 않는 것. 자신의 부끄러움까지 알고 계시는 분의 사랑을 끝내 신뢰하는 것. 어쩌면 참된 믿음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고백 뒤에 반드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흘러갑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움직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높은 언어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드러나고, 거창한 선언보다 작은 돌봄 속에서 증명됩니다.
지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 약한 이를 귀찮아하지 않는 일, 상처 입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일,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작은 이를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바로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도 끝까지 “내 양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주인이 아닙니다. 맡겨진 생명을 대신 돌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며, 신앙의 중심은 힘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다른 이들이 너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젊은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 내가 계획한 미래, 내가 선택한 방향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자기 뜻을 내려놓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를 자꾸만 내가 원하지 않던 자리로 데려갑니다. 용서하기 싫은 사람 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픔 속으로, 침묵하며 견뎌야 하는 자리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십자가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기를 멈추는 것. 하느님의 선의 흐름이 나를 통하여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 내가 붙들고 있는 욕심과 자존심과 통제의 끈을 조금씩 내려놓고, 사랑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데려가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십자가 위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성숙해진 자리였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 이제는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처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들었던 바로 그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갈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은 과거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실패한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넘어졌던 자리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각자의 삶의 호숫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조용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완벽한 대답을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또다시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실패했음에도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부끄러움 속에서도 다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 아마 신앙이란 완벽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끝내 사랑의 부르심을 따라 다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결국 예수님이 보여주신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와 자비의 강물이 되어 사랑의 바다로 흐르는 관계의 신비를 너와 나 사이에, 온갖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매일 매일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