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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된 모든 실재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눈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 모든 실재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눈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외부에서 어떤 가치를 받아야 완성되는 분이 아니시며, 누군가의 인정이나 응답으로 비로소 충만해지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그 존재 자체로 충만하시고, 완전하시며,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부르신 것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사랑을 인간과 나누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필요의 선택이 아니라 은총의 선택입니다. 그분이 어떤 존재를 바라보시고 선택하실 때, 그 존재는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고유한 가치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창조의 깊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하느님께 무엇을 보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선택하셨기에 존엄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증명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바라보시고 사랑하셨기에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은 강압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안에서 열리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먼저 오시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현존은 일방적인 침입이 아니라 호혜적이고 상호적인 만남입니다.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받아들임 안에서 비로소 우리 사이라는 관계의 자리가 열립니다. 그러기에 받아들임이 없는 곳에는 현존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이 신비의 가장 순수한 모델입니다. 마리아의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응답은 단순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는 자리로 내어드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이해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뢰했기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그 신뢰 안에서 말씀은 살이 되셨고,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육화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거룩함이 더 이상 하늘 높은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은 이제 밥상 위에 있고, 거리 위에 있으며, 노동과 눈물과 침묵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사는 가장 구체적인 자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그러므로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경계선을 허무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얼굴에서, 실패한 사람의 한숨에서, 자기 죄를 부인하지 못해 가슴을 치는 세리의 고백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봅니다. 그는 속된 것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된 것이라 여겨졌던 자리 안에 숨어 있는 은총의 빛을 발견합니다.

 

종교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주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일에 몰두합니다. 누가 깨끗한 사람인지, 누가 더 거룩한 사람인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를 구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은 때로 참된 식별이 아니라 가짜 분별이 됩니다. 가짜 분별'이 만드는 분리된 세계 종교의 초기 단계나 미성숙한 단계에서는 '거룩한 것''속된 것'을 나누는 데 집중하곤 합니다. 성직계급, 복잡한 율법, 정결의식 등은 사실 '우리''그들'을 나누는 성벽이 됩니다. 이 성벽 안에서 에고(Ego)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착각과 함께 가짜 안전을 경험합니다. 우월감의 독: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타인과의 연결을 끊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느님과의 연결마저 방해합니다. 내가 이미 거룩함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만든 자기 감옥에 사는 바리사이는 율법적으로는 완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라는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분리를 통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는 자신이 속된 것(세리, 죄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길이 아니라, 에고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쌓는 성벽이 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었지만,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완벽함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리와 자신을 나누었고, 그 분리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바로 하느님과의 단절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종교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정직함이 은총의 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고, 하느님 앞에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 빈자리 안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흘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신 것은 종교적 완벽주의에 대한 깊은 전복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은 자신을 높이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는 길입니다. 거룩함은 흠 없는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들일 만큼 비워진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입니다.

 

()과 속()의 장벽을 허무는 통찰

참된 영성은 세상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결국 육화의 신비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경계를 허무는 데 있습니다. 참자아의 깨침: 참자아를 깨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성전 안에만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세리가 돈을 거두는 그 비루한 거리 위에도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압니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나누며 자기 의로움을 세우지 않습니다. 참된 영성은 모든 실재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는 버려진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속되다고 밀어낸 자리에도 하느님은 이미 낮은 빛으로 머물고 계십니다.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실패 속에서 겸손을 보고, 죄의 고백 속에서 은총의 문을 보며, 가난한 일상 속에서 육화의 신비를 봅니다. 그는 특별한 성소만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 평범하고 때로 초라한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 응답합니다.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멀리 계시는 차가운 절대성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까이 오시는 창조적 자유입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필요 없으시지만, 우리를 필요로 하듯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완전하시지만,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지만, 인간의 자유 앞에서는 문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선택하신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우리 안에 머물고자 하시는 현존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 때, 평범한 빵은 생명의 표지가 되고, 평범한 일상은 성전이 되며, 부족한 인간은 하느님의 현존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이것이 육화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셨다는 것, 거룩함이 따로 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 안에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영성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시 깊이 바라보는 눈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누어진 세계를 다시 하나로 봅니다. 버려진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속된 것이라 불리던 곳에서 성스러운 숨결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로움의 성벽을 내려놓고, 세리처럼 빈손으로 기도합니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로 그 빈손 위에 은총이 내려옵니다. 바로 그 낮은 자리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다시 세상에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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