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제의 기도와 우리 신앙의 현주소 1.
프란치스칸 영성의 흐름 안에서 다시 읽는 요한복음 17장
수난의 문턱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실 때, 그 기도는 단순한 간청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분은 무엇을 청하시기보다, 이미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완전히 봉헌하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그 관계 안으로 끌어들이십니다. 이 기도는 하늘을 향한 말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 살아내야 할 존재의 방식입니다.
1. 영원한 생명 — 앎이 아니라 ‘흐름 속의 일치’
“아버지를 알고, 보내신 이를 아는 것.” 이 ‘앎’은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생명이 서로 안에 흘러드는 관계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이해하려 하고, 신앙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묻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가. 프란치스코 성인이 깨달았던 이 ‘앎’은 머리로 쌓아 올린 확신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흘러들어오는 은총의 체험이었습니다. 자신을 비울수록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더 깊이 솟아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내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2. 거룩함 —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분명합니다. 우리를 세상 밖으로 빼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방식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도피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세상은 소유하고, 비교하고, 지배하려 하지만 복음은 내려놓고, 나누고, 함께 머물기를 요청합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관계를 가로막는 소유를 내려놓는 자유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가 거룩함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성당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이웃 곁에서 드러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보이는 관계 안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 일치 — 사랑이 증명되는 유일한 방식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단순한 화합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일치는 힘의 균형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순환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신을 보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건네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형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치는 감정이 아니라 선의 흐름이 막히지 않는 상태입니다. 서로를 향해 흐르는 그 선이 멈추지 않을 때, 그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됩니다.
4. 오늘의 우리 — 기도 안에 이미 포함된 존재
예수님의 기도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들의 말을 듣고 믿게 될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안에 이미 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기 전에 이미 기도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응답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계셨다는 사실. 그 깨달음이 우리 삶을 바꿉니다.
5. 파스카 신비, 하느님의 선이 지금 여기에서 나를 도구 삼아 너에게 흘러감
예수님의 기도는 곧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완전한 내어줌의 절정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 려 그 안에서 생명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내려놓을 때 관계는 살아나고, 우리가 비워낼 때 하느님의 선이 흐르며,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이 시작됩니다.
대사제의 기도와 우리 신앙의 현주소 2.
삼위일체의 관계적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길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는 단지 하늘을 향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면, 곧 삼위일체의 생명 방식을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계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적 선의 흐름 안에 계십니다. 그분들은 서로를 소유하지 않으며, 서로를 통해 더 충만해지고, 서로 안에서 자신을 완성하십니다. 이 흐름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하나 됨”의 실체입니다.
1. 삼위일체의 관계적 선-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선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생명입니다. 성부는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성자는 받은 것을 다시 내어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을 관계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 흐름 안에서는 막힘이 없고, 자기 보존이 없으며, 소유의 집착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은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흘러가고 있는가로 드러납니다.
2. 우리의 현실-선의 흐름을 막는 것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이 흐름과 자주 충돌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비교하고 싶은 습관,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 내 것을 지키려는 불안, 이 모든 것은 선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내부의 장벽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가난은 바로 이 장벽을 허무는 길입니다.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막지 않는 상태입니다.
3. 삼위일체적 삶-일상에서 실천하는 구체적인 길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이 거대한 신비가 우리의 아주 작은 일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질 수 있는가. ① 말을 건네는 방식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은 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판단보다 이해를 먼저 선택하기,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 상처 주는 진실보다 살리는 말을 선택하기, 한 마디의 말이 관계를 막을 수도, 흐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② 소유와 나눔의 태도에서, 우리는 물건뿐 아니라 시간과 관심도 소유하려 합니다. 삼위일체적 삶은 이것을 나누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쁜 중에도 잠시 시간을 내어주기, 작은 것이라도 기쁘게 나누기, 보이지 않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필요를 채우기, 흐르는 것은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③ 갈등의 순간에서, 갈등은 선의 흐름이 막히는 지점입니다. 이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이기려고 할 것인가, 관계를 살릴 것인가, 삼위일체의 방식은 항상 자신을 내어주는 쪽을 택합니다. 먼저 사과하기, 이해되지 않아도 받아들이기, 상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④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선은 눈에 띄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더 깊이 흐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하기,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기, 드러나지 않는 선을 선택하기,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칸의 ‘작음’입니다. ⑤ 고통과 상실의 순간에서, 우리는 고통 앞에서 흐름을 닫아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고통을 통해 선이 흐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원망을 내려놓기, 아픔 속에서도 타인을 향해 마음 열기, 고통을 통해 더 깊어지는 사랑 받아들이기, 고통은 끝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4. 결론-우리는 ‘흐르게 하는 존재’입니다
대사제의 기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아는 삶,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사는 삶, 사랑으로 하나 되는 삶.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길로 모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음성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맡깁니다. 하느님의 선이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도구됨 안에서 가장 깊은 기쁨이 시작됩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이 나를 통해 흘러간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 존재를 가장 충만하게 합니다.
주님,
제가 선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선이 흐르는 길이 되게 하소서. 막으려는 마음보다 내어주는 마음을, 붙잡으려는 손보다 놓아주는 손을, 지키려는 삶보다 흐르게 하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삶의 모든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가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