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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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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나약한 하느님 2

우리는 늘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오래 남는 것을 향해 손을 뻗으며 살아갑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 무너지지 않는 것, 상처 입지 않는 것, 시간에도 닳지 않고 죽음에도 삼켜지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붙들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마르고, 기억은 흐려지며, 사랑하는 것들은 떠나가고, 아무리 단단히 움켜쥔 것이라도 결국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것을. 인간은 유한하다는 사실 앞에서 가장 깊이 떨고, 자신이 끝내 무너질 존재임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때 비로소 권력과 소유와 명예와 젊음과 건강과 인정의 껍질들을 더 다급히 그러쥐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외가 되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내 사랑만은 사라지지 않기를, 적어도 내 삶만은 헛되지 않기를, 적어도 내가 기대어 사는 어떤 존재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유한한 자기 바깥에 있는 무한, 부서지는 자기 바깥에 있는 영원, 약한 자기 바깥에 있는 완전한 힘을 향해 오래도록 성전을 세우고, 제단을 쌓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하느님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낯선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전능을 기대했는데, 그분은 연약함으로 오셨고, 우리는 승리를 기대했는데, 그분은 상처로 오셨으며, 우리는 높은 곳의 영광을 기대했는데, 그분은 낮고 어두운 곳의 떨림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아이가 울고, 늙은 이가 홀로 병상에 누워 있고, 억울한 이들이 설명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누군가는 버림받고, 누군가는 자기 죄보다 더 큰 수치를 뒤집어쓴 채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그 물음 앞에서 성경이 들려주는 대답은 벼락처럼 내려오는 해답이 아니라 살처럼 찢기는 한 생애입니다. 하느님은 멀리서 고통을 해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눈물을 관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하나의 교리나 명제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배고픔 속으로, 추위 속으로, 오해 속으로, 배척 속으로, 사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계의 아픔 속으로,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르며 숨이 꺾여가는 죽음의 자리 속으로 그분 자신이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큰 반전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힘을 찾았으나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 내어줌으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나도 아프다.” 성경 전체가 끝없이 변주하는 하느님의 고백은 어쩌면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너의 고통 바깥에 있지 않다. 나는 네가 외로워하는 바로 그 자리 안에 있다. 나는 네가 버텨내는 시간 속에 함께 갇혀 있고, 네가 흘리는 눈물의 온도를 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바로 이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한 그리스도는 세상의 기준으로 높아진 왕이 아니라 구유의 냄새 속에 누워 있는 아기였고, 길 위에서 머리 둘 곳 없이 떠도는 나그네였으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진 채 모든 것을 내어준 가난한 사랑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가난한 이로 보았습니다. 그 가난은 단지 재산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 존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억지로 붙잡지 않고, 자신을 입증하려 들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 힘을 행사하지 않으며,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클라라도 같은 빛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이 말하는 안전과 보호의 체계보다 그리스도의 가난 안에 있는 충만을 더 참된 것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결핍의 미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어디까지 자기를 비울 수 있는지, 하느님이 인간과 얼마나 끝까지 함께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눈부신 계시였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육화의 진실, 영원하신 분께서 시간 속에 갇히셨다는 사실, 온전하신 분께서 배고픔과 피곤함과 눈물과 죽음을 겪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듭니다. 하느님은 고통 없는 세계에 홀로 거하시며 우리에게 그곳으로 오라고 명령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의 상처 난 세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상처를 당신 거처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지 속죄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존재 방식의 결정적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약해지시는 분,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 사랑 때문에 상처 입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사랑하는 자가 자신을 내어준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지배할 수 있어야 신이라고 생각하지만, 복음은 함께 울 수 있어야 하느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세상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능력을 찬양하지만,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는 능력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이해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나라는 더 이상 죽음도 눈물도 없을 완성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으로 가는 길은 현재의 약함을 부정하거나 숨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약함 속에서 이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데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강해져서 하느님께 갈 수 있게 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약함 속까지 내려오셔서 거기서 나를 붙드시고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은 더 이상 단지 부끄러움의 표지가 아닙니다. 실패와 상처와 눈물, 이해받지 못한 시간과 말할 수 없는 결핍,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었던 고독의 밤들은 이제 단순한 결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스며드는 틈이 됩니다. 우리가 가장 무너졌다고 느끼는 자리, 내가 내 힘으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리,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고 자랑할 수도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복음은 맑아집니다. 하느님은 그런 곳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곳을 찾아오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완전해져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자라왔는데, 하느님은 상처 입은 그대로의 인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강해야 쓸모 있다고 배워왔는데, 하느님은 부서진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당신 사랑의 자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성공과 정돈과 확실함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분은 흔들리는 믿음, 떨리는 손, 겨우 이어가는 하루, 말없이 삼키는 눈물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진정 강한 사람입니까. 끝까지 자신을 감추고 방어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랑 때문에 자기 연약함을 내어놓는 사람입니까. 누가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 남을 굽어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낮은 자리로 내려가 타인의 고통 옆에 머무는 사람입니까. 누가 복음의 신비에 가까운 사람입니까. 흠 없는 얼굴로 살아남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상처 입은 채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까.

 

프란치스코의 길은 이 질문에 몸으로 답한 길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다가 세상이 버린 이들의 얼굴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나병환자의 상처, 가난한 이의 굶주림, 작고 약한 피조물의 떨림, 자기 안에 도사리는 욕망과 허영의 부끄러운 그림자까지도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난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자리로 내려가는 사랑의 선택이었습니다. 클라라 역시 담장 안의 안전보다 그리스도의 가난한 충만을 더 깊이 신뢰했습니다. 그녀의 침묵과 기도, 그녀의 가난과 견딤은 하느님의 힘이 인간적 강인함이 아니라 사랑의 충실함 안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고통은 여전히 아픕니다. 복음은 고통을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살을 찢고 숨을 끊는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연대는 고통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절망에서 우리를 건져냅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이 한마디가 인간을 다시 살게 합니다. 내 슬픔이 하느님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고, 내 신음이 그분께는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이 아니며, 내 실패와 무력감이 그분 사랑의 문턱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 이 사실 하나가 절망의 밤에 작은 등불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멀리 계신 전능자가 아니라 가까이 계신 가난한 연인입니다. 그분은 내 상처를 급히 봉합하여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나가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상처 곁에 앉아

그 아픔의 시간을 함께 견디시는 분입니다. 내가 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 설명하지 못해도 그분은 내 울음의 뜻을 아십니다. 내가 나 자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날에도 그분은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무력하여 아무 기도도 하지 못하는 밤에도 그분은 이미 내 안에서 신음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유한함은단지 저주받은 인간 조건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신 자리, 하느님께서 머무르기로 택하신 자리, 하느님께서 사랑의 가장 깊은 얼굴을 드러내신 자리입니다.

 

눈물은 더 이상 부끄러움의 흔적만이 아니고, 상처는 더 이상 감추어야 할 흠만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지나가신 자리, 그분이 나와 함께 계셨고 지금도 계시다는 작고도 깊은 표지가 됩니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큰 구원은 강해지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사랑 앞에서 약해질 수 있게 되는 것, 하느님 앞에서 자기 유한함을 숨기지 않게 되는 것, 타인의 고통 앞에서 서둘러 설명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 바로 거기에 구원의 빛이 이미 비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난하고 나약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힘의 논리를 버리고 사랑의 연약함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높아지려는 본능 대신 내려가려는 은총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며, 해결보다 동행을, 승리보다 충실을, 권능보다 자비를 더 깊은 진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한한 힘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고, 찢기고, 버려진 자의 자리까지 내려가 끝내 함께 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작고 연약해 보여도 그 안에는 이미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 있습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헛되지 않고, 우리가 견디는 시간은 버려지지 않으며, 우리가 감당하는 상처는 하느님께 닿지 못하는 어둠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나약한 하느님, 당신은 높이 계시기보다 가까이 계시며, 강하게 군림하기보다 함께 부서지기를 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고통의 바깥에서 해답을 던지는 분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떨고, 함께 울고, 함께 피 흘리며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압니다. 내가 가장 약할 때에도 당신은 가장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내가 가장 가난할 때에도 당신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이 내 안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 앞에서 인간의 모든 눈물은 조금씩 다른 빛을 띠기 시작합니다. 고통은 여전히 아프지만 절망만은 아니며, 가난은 여전히 춥지만 버려짐만은 아니고, 나약함은 여전히 떨리지만 부끄러움만은 아닙니다. 그 모든 자리에서 가난하고 나약한 하느님께서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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