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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 피의 잔과 사랑의 구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흔히 오해되듯 어떤 종교적 보상을 얻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지상의 영광이나 안락함과 본질적으로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성은 상승이 아니라 하강이며, 확장이 아니라 비움이고, 소유가 아니라 내어줌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편안한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당신의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사랑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아닙니다. 회개한 뒤에, 변화한 뒤에, 자격을 갖춘 뒤에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존재론적 사건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 안으로 직접 들어옵니다. 그 절정이 바로 피의 잔입니다. 성찬의 잔은 단순한 전례적 상징이 아닙니다. 그 잔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형식입니다. 그리고 그 계약은 말이나 율법이나 서약으로 체결되지 않습니다. 피로, 곧 생명으로 체결됩니다. 성경에서 계약은 언제나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계약은 조건의 교환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위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열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피가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선택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의도된 내어줌이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피는 죄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죄를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품고, 그 죄가 더 이상 관계를 끊지 못하도록 자신을 상처로 내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용서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용서는 정의를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정의를 넘어 관계를 살리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합니다. 용서는 말로 선언될 수 있지만, 완성은 반드시 누군가의 상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그 상처의 자리에서 흘러나온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피의 잔을 숭배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잔을 바라보며 감동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그 잔이 향한 방향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사랑이 관계를 살리기 위해 얼마만큼의 자기 포기를 필요로 하는지 삶으로 동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잃는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용서 안에 머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아의 해체를 경험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내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권리,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욕망이 하나씩 내려놓아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의 역설이 드러납니다. 잃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형이며, 비움은 공허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올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과거에 한 번 흘린 피가 아닙니다. 그 피는 지금도 사랑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관계 안에서, 우리의 일상 안에서 조용히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특별한 영웅적 결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의 관계 안에서 피를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는 느리고 구체적인 선택입니다. 그 길은 눈에 띄지 않으며, 대개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은 오늘도 갱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사랑의 방식에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느냐?

 

아니요는 하느님의 일이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 큰 기쁨을 경험하기도 전에 아니요를 말하는 법부터 배워왔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성숙이라 여겨졌고, 죽는 것을 견디고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깊이라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오해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아닙니다. 또한 그것이 반드시 타인을 살리는 선택도 아닙니다. 강요된 아니요의 밑바닥에는 종종 크나큰 미련과 해결되지 않은 자기 연민이 숨어 있습니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억눌렀고, 내어준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딘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아니요는 자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기 파괴가 아닙니다하느님은 인간을 소진시키는 분이 아니라 살아나게 하시는 분입니다따라서 영적 성숙은 얼마나 많이 아니요를 말했는가로 측정되지 않습니다진정한 기준은 이것입니다그 아니요가 얼마나 자유로운 를 준비했는가입니다하느님의 사랑과 자유 안에서당신이 일상에서 아니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만큼기꺼운 를 창조해 낼 수 있을 때그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완성됩니다이 는 의무에서 나오는 순종이 아니라 기쁨에서 솟아나는 동의입니다억지로 감당한 희생이 아니라 살아 있음에서 흘러나오는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굶기기 위해 아니요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더 깊고 참된 를 우리 안에서 탄생시키기 위해 잠시 멈추게 하실 뿐입니다. 결국 신앙의 성숙이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자유롭게 사랑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억지로 참아낸 침묵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건네는 자유로운 안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피의 잔이 말하는 죽음은 아니오를 분명하게 선택하고 결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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