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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8 06:11

늦가을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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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묵상

 

빛과 침묵이 만나는 시간, 늦가을의 오후, 슬프도록 아름답고, 시리도록 눈부신 계절입니다. 늦가을의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을 때면,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세상의 소리를 잠시 꺼둡니다. 이 시간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거룩한 멈춤'의 시간 같아서, 분주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롯이 풍경 앞에 서게 만듭니다. 하늘은 낮게 깔리고, 바람은 날을 세워 불어오고, 낙엽들은 이름 모를 서러움을 싣고 허공으로 흩어져 갑니다.

 

 

세상은 온통 비워지는 중입니다. 나무들은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대지는 숨을 죽이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 상실의 계절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잎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나무의 앙상한 뼈대처럼, 내 안의 감추고 싶었던 한계와 연약함,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리움과 슬픔의 자리입니다. 풍요로울 때는 보이지 않던 '진짜 나'의 모습이, 이 빈 들판 위에서 비로소 정직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낙엽은 떨어질 때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떨어짐의 작은 음향 속에는 한 계절을 살아낸 고요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텅 빈 들판 위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그 진실을 내 마음으로 데려옵니다. 낙엽이 집착 없이 제 몸을 허공에 맡기듯, 텅 빈 들판 위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묻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억새들이 하얀 머리칼을 흔들며 서걱거리는 소리는 어딘가로 떠나가는 이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 같기도 하고,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이라는 조용한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길가에 몇 송이 남지 않은 들국화가 가느다란 떨림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여린 몸짓 앞에서 숨을 고릅니다. 그 떨림이 내 영혼의 주파수와 맞닿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적막한 풍경 사이로 첼로의 묵직한 선율이 환청처럼, 혹은 실제처럼 흘러듭니다. 현을 긁고 지나가는 그 낮고 깊은 소리는 닫혀 있던 내 마음의 빗장을 풉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사랑, 혀끝에서 맴돌다 삼켜버린 말들, 그리고 세월 속에 딱지 앉은 상처들이 그 선율을 타고 하나둘 깨어납니다. 못다한 사랑, 말하지 못한 마음, 감추어둔 상처들을 하나하나 흔들어 깨웁니다.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듯한 예리한 슬픔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이 슬픔은 나를 주저앉히는 절망의 무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영혼이 아직 살아있음을, 내가 아직 사랑하고 아파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뜨거운 증거입니다. 늦가을의 슬픔은 소란스러운 감정의 잔제가 아니라, 내 내면을 비추는 가장 '정직한 침묵'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침묵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느낍니다. 인간의 언어가 멈춘 그 자리에 하느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나의 힘이 빠진 빈자리를 당신의 은총이 채우고 있음을.

 

빛은 대낮의 환한 거리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빛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의 어둠, 나의 슬픔, 나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그 속에 숨겨진 빛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가을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자, 내가 붙들어야 할 믿음입니다. 오늘도 나는 이 쓸쓸하고도 찬란한 늦가을의 오후, 침묵 속에 피어나는 빛을 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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