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그 박해는 멀리 있는 사람,
즉 나와 상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즉 가족 안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이상
예수님께 파견을 받은 이상
박해는 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다른 공관복음에도 있습니다.
마르코와 루카도 이 내용을 전하는데
마태오복음만 또 다른 내용을 덧붙입니다.
박해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하신 미움을 견디라는 말씀과
이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움을 견디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박해를 피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서로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상황에서
아니 한 발 더 나아가면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상황에서
박해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미움을 견딘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들의 입맛에 따라가다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여기에서의 초점은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데 있어
예수님께서는 뱀처럼 슬기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이 말씀은
임기응변으로 박해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임기응변은 자칫 이 상황에서는 이것을
저 상황에서는 저것을 말하면서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하느님에게서 오기에
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굳이 갈등의 상황을 만들어 가면서 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박해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움을 견디는 것이나
박해를 피하는 것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해의 상황에서 견딜 것인지 피할 것인지
선택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는 것에
우선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