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르셀로나 성가정 대성당
작가 :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 : 1852- 1926)
시작 : 1886-
소재지: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
신자들이 줄어들면서 유럽의 여러 성당들이 폐허화 되기도 하고 운영이 어려운 교구는 이런 성당이나 수도원을 팔아 어떤 것은 유흥장으로 어떤 것은 심지어 이슬람 사원으로 변하고 있다는 서글픈 기사를 종종 대하게 된다.
성당이 폐허가 될 만큼 신자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걷잡을 수 없이 닥치는 세속화에도 큰 이유가 있겠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 자체가 예수를 보이지 못하는 이질적인 집단으로 변질된 데에도 큰 원인이 있으며 이것을 바로 오늘의 교회와 크리스챤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다.
교회가 예수의 모습을 보이는 것 보다 자기 조직 자체의 유지 수단으로 변질되면 사람들에게 매력을 잃기 마련이며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안에서 예수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의 조직으로 변질됨에서도 큰 이유가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기질상 교회 제도가 만든 성직주의나 교권주의라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직거래를 하는 것 같은 자유로운 신앙태도를 통하여 따뜻한 인간관계와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엮어진 공동체 의식을 만듦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건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대성당은 성가정에 봉헌된 성당을 짓고픈 어느 신자에 의해 시작된 것을 안토니오 가우디가 맡아 건축하자 여러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동참하면서 지어져 오는 2026년 완공을 계획으로 건축이 진행 중인 성당이다.
작가는 건축가이기 이전 너무도 고귀한 그의 삶 때문에 시복 수속을 받고 있는데 아쉬움이라면 그가 한때 세상 시각으로 볼 때 부유하고 사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시복 수속의 장애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작가는 이 대성당 건축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신앙도 그리 깊지 않았고 뭣보다 당시 사회적으로 알려진 저명 인사로서 사교적인 일에 관심이 많다보니 성인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검박하거나 희생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사치스런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대성당 건축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정화시켜 대성당 건축이 그의 영적 성장의 도구가 되었고 성당이 완성되는 것 만큼 그의 생활 태도 역시 성화된 삶으로 변했다.
현행의 시복 수속은 교회 역사에서 영글은 성직자 수도자들에 적용되던 기본을 벗어나지 못해 가우디의 시복 수속이 지연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작가의 시복 시성을 통해 교회 시성 기준이 새로운 차원으로 정착되기를 바란다.
가우디의 시복 과정을 통해 평신자의 삶에 어울리는 현대적 성덕의 기준이 새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건축사에서 비쟌틴 로마네스크 고틱과 같은 여러 양식이 있으나 작가는 이 모든 양식을 여기에 겹쳐 자기 고향인 카탈로니아 고틱 양식에 주안점을 두고 한계가 없는 건축가로서 세월을 뛰어넘는 건축, 상상력과 창의력의 결정체로 여겨지는 건물을 지었기에 완성도 되기 전부터 온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면서 매일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관광의 차원에서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성당을 바라보는 자체로서 각자에게 필요한 복음적인 지혜와 감동을 얻을 수 있기에 이 성당은 관광의 장소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하느님을 새로운 차원에서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성당들이 문을 닫고 다른 시설로 태어나는 서글픔과 전혀 다른 희망과 기쁨의 장소가 되고 있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자연에 심취하면서, 자연은 어느 하나 반복되는 것이 없이 대단히 독창적인 것에 매혹되면서 이것을 자기 건축에 도입해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장소인 성전이 우주 만물과 삼라만상이 하느님의 찬송하는 거대한 합창임을 자기 건축을 통해 표현했다.
“주님을 찬미하라 그의 성소 안에서 우람한 그의 하늘에서 주님을 찬미하라........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편 1. 6.)
작가는 과거 어느 시대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묘한 형상의 성당을 설계했으나 이런 독창적인 양식이 성서의 중요 장면을 정확히 표현하기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돌에 새겨진 성서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작가는 먼저 중앙을 고틱 양식에서 볼 수 있는 12개의 탑으로 채웠는데, 그중 예수님 상징인 탑을 170 미터로 가장 높이 했으며 그 주위에 4개의 탑을 복음 사가, 요한 마태오, 루카, 마르코에게 봉헌했으며 여섯 번째의 탑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탄생과 수난과 영광의 문을 만듦으로 12개의 탑이 되면서 전체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 건물은 작가의 건축에 대한 모든 지식이 종합적으로 표현되어 세계 역사상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 걸작품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지하 성당에는 이 대성당의 핵심 상징인 나자렡 성가정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과거 성가정 상과 전혀 다른 성가정 상을 제시했는데 과거 성가정 상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부각시키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경배하거나 아니면 아들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했는데 여기서는 획기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성 요셉 성인의 손에 입 맞추면서 인간 아들 예수로서 부모에 대한 공경심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과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강조가 성가족으로서 어색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이것이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되던 것을 우리와 같은 모습의 인간으로 정착시키는 좋은 시도가 되었다.
예수님의 성가정을 지나치게 신비화하거나 초자연적으로 표현하던 것과 달리 성가족은 이 세상 여느 가족처럼 땀 흘리며 살았다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성가정과 다른 가정의 차이 즉 초자연성과 자연성을 벽을 허물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기가 하고 있는 이 대성당 건축 역시 성가정의 아들로서 일하신 예수님의 노동과 일치시킴으로써 크리스챤 영성은 세상과 동떨어진 백일몽을 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이 성당을 성서 전체를 설명하는 한편의 감동적인 강론으로 표현했다. 펼쳐진 성서와 같은 이 성당을 보면서 관람객들은 자기 마음에 감동을 주는 부분을 통해 자기 삶에 필요한 성서적 지식을 섭렵하게 된다.
삼나무는 묵시록에 등장하는 생명의 나무로서(묵시록 22장 1- 2절), 오늘도 교회 묘지에 많이 심고 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니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죽음을 뛰어넘는다는 교회의 신학을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에 깃들이고 있는 비둘기들은 교회의 가르침에서서 생명의 양식을 얻는 신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작가가 이 삼나무를 생명의 나무로 묘사한 것은 이 성당 건축을 통해 자기의 실력을 확인하는게 아니라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이 지닌 매력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작가는 심혈을 다해 성당 건축에 매달리는 것은 자기 영적 성장을 향한 투자로 보았다
사실 작가는 그전까지 바르셀로나 사회의 상류 인사로서 살았으나 이 성당에 매달리면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기에 더없이 검박한 삶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도시에 있는 엄격하기로 소문한 카르튜시안 수도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 수도원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 수도원에 심겨져 있는 삼나무들을 통해 삼나무가 주던 신앙 체험을 여기에 투사하게 되었다.
삼나무에 있는 T자는 희랍어 첫 글자인 TAU(타우)이며 공교롭게 히브리어의 마지막 글자와 같기에 ‘“시작과 마침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 위에 날개를 펼치고 있는 비둘기는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즉 성령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종탑의 절반 위치에 배치하면서 새로운 상징을 부여했다. 즉 교황이라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라는 단어의 원래 뜻인 “다리 놓는 사람”을 원래의 뜻을 새겨 이 대성당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다리 역할을 하는 곳으로 표현했다. 즉 이 성당을 통해 인간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로 보았다.
작가는 측면 첨탑들의 중간에 도자기로서 과일 바구니를 만들어 얹어 두었다. 이것은 과거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참신하면서도 생경스러운 시도였는데 작가는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선성을 바로 이런 과일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성당 전체의 윤곽만이 아니라 제의실이나 전례 용구에까지 섬세한 배려를 하고 무엇보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중세기 고틱 성당에 필수인 물받침 등에 신비적 동물인 가르고일이라는 동물 형상을 표현한 것을 작가는 중세기에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도롱용 뱀 달팽이 같을 실재 동물들도 등장시킴으로 하느님의 집인 대성당이 바로 천상의 공간임과 동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중요 공간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여러 복잡한 교리 이론과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하느님을 설명하는 것과 달리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삶의 현장에서 너무 자주 만날 수 있는 과일들이나 동물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 과일 바구니는 또한 계절의 변화를 통해 신앙의 풍요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복숭아, 무화과, 자두는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면서 탄생을 상징하고, 수난의 벽에선 밤 오렌지 석류를 통해 가을과 겨울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의 천재성은 어떤 해박한 건축 이론에 있는게 아니라 삼라만상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말씀처럼 빛은 신앙 표현의 기본이기에 불교에서도 대웅전은 큰 빛이 내리는 곳이란 뜻의 “대적광전” 이란 용어를 사용하듯 교회 건축 특히 고틱 건물에서는 건축술의 개발로 벽에 공간을 많이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이 공간을 빛의 공간으로 처리한 것이 바로 스테인드 글라스이며 코틱 대성당의 중요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스페인 고틱 건축의 정수인 레옹 대성당에는 무려 총길이 1800미터를 덮는 125개의 큰 창문과 57개의 작은 창문으로 성서의 많은 내용을 그려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을 뿜으며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고틱 양식의 생명과 같은 이 부분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여 적임자로 이 방면의 대가를 정평난 후안 빌라 그라우에게 이 작업을 맡기자, 그는 가우디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은 계획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이 작업은 전통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과 전혀 다른 방법론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중세에 정착된 전통적인 스테인드 글라스는 찬색과 따뜻한 색을 혼합해서 조화를 찾는 것이었으나 이 대성당은 자기가 창안한 독특한 방법으로 가우디가 구상하는 다음과 같은 의도에 맞는 작품을 제작했다. 가우디는 그가 원하는 이 성당 전체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성가정 대성당은 환하게 빛날 것이다. 조화로운 빛의 향연을 벌리는 대성당이 될 것이다.”
작가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가우디의 이 의도를 살리기로 노력했으며 결과적으로 작가의 의도 이상의 작품으로 이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톨릭 교회에 있는 빛의 영성이 주는 감동에에 젖게 만들고 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격언처럼 이 대성당은 작가가 맡기 이전 시작했던 봉헌자를 시초로 작가를 포함한 40여명의 건축 설계사, 200여 명의 건축가, 조각가 도자기 전문가 스테인들 글라스 제작자들이 동원되었고 작가의 열정에 매료된 일본 조각가 소호토 에츠로도 자발적으로 동참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천사들의 조각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서 이 성당은 명실 공히 세계인들이 동참하는 대성당이 되고 있다.
그의 죽음 후 이 대성당의 모금 범위는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확산되었다. 이 성당에 매력과 감동을 느낀 사람들의 모금을 통해 이 성당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 대성당은 2026년 완공 예정이기에 아직 미완성이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성당 못지않게 신앙이 주는 벅찬 감동과 매력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예수의 모습을 보여야 할 교회 조직이 인간들의 약점 때문에 만들고 있는 비복음적인 태도와 부조리한 처신이 신자들에게 실망과 억압감을 주면서 신자들이 떠나면서 교회가 동공화 되고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작가의 시도에 동참하는 후원자들의 열정으로 지어지고 있는 이 대성당이 하느님을 찾는 많을 사람들을 교회안으로 끌어들이는 진공 청소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길 희망하며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