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이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오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원칙,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원칙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란 모든 복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래서 행복을 원한다면 하느님께 복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내 행복은 내가 농사짓는다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있고 그래서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 순종이 오늘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그 정도의 순종이라면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순종할지 저의 믿음에 대해 생각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해도
자식이 나의 복이고 행복인데 그 봉헌을 요구하는 하느님이라면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분노할 것이고 그래서 불순종할 것입니다.
나의 행복인 자식을 내놔야 복을 주신다니!
이 말은 내가 움켜쥐고 있는 나의 행복을 내놔야
하느님의 행복이 주어지는 거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의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복이라!
내가 쥐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이라!
아!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어려운 것을 넘어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서 이런 행복을 구차하게 구걸하느니
차라리 행복을 걷어차고 내 행복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깔 있는 불순종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이런 맞짱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맞짱을 뜨고 깨끗하게 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짱을 떠보지도 않고 승복도 제대로 하지 않을 바엔 맞짱을 뜨는 것이 낫습니다.
아브라함도 바로 믿고 순종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모리야 땅까지 가는 데 왜 사흘이나 걸렸겠습니까?
이 사흘이란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치열하게 싸웠을 겁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맞짱을 뜨고,
나의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낫습니다. 라고 승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아니라 승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승복의 순종을 하는 데 사흘 걸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저를 생각합니다.
완전히 승복하고 순종하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