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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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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와 열매

*** 성령의 은사
사도 바오로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5,17)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거짓 자아 구조에서 벗어나서 참 자아에 대한 자각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창조이다. 떠나보낸 낡은 인간은 거짓 자아의 세계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정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를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라고 한다. 이 특별한 은사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용기를 북돋워 준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는 성령의 활동이며 움직임이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그 영감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도록 초대하신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점점 더 우리 삶을 차지하게 되고, 우리가 거짓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의 참 자아와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드러내도록 변형시킨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는 우리 안에서 사랑의 향주덕이 자라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사랑이 확고히 자라남에 따라 모든 은사들이 점점 더 뚜렷이 드러난다.
성령은 일곱 가지 은사와 함께 있다. 그것들은 세례 받는 그 순간이나 세례 받고자 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온다. 하느님을 진실하게 찾는 모든 이들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견진성사 안에서 그 은사의 활동성은 엄청나게 강화된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은 세례와 견진성사의 모든 은사를 재확인하는 순간이다. 또한 성령의 선물을 더 받게 된다.
성령의 은사는 향주 삼덕인 믿음, 희망, 사랑의 성장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식대로 우리를 정화시키고 일으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것 안에서 일어나는 변형의 덕이다. 이사야서 11장 2절에서는 이런 은사를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기, 지식과 경외라고 한다. 70인역과 불가타 성경에서는 여기에다 믿음을 첨가하였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는 관상적 은사와 활동적 은사로 구별된다.
1. 활동적 은사 : 경외, 굳셈, 효경, 의견
2. 관상적 은사 : 지식, 깨달음, 지혜

먼저 경외의 은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경외
이 은사의 주된 영감은 우리의 삶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영적 여정을 계속해 나갈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영적여정은 우리의 환상을 정화시키고, 악한 것을 추구하거나 선한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외의 은사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한다. ‘두려움’이라는 말은 무서운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 외경, 존경이라는 의미에서의 두려움을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온 경외이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이 은사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즉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 자신과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참된 존경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세 차례의 유혹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황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정확히 자신의 위치에서 대응하셨다. 매번 그분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 주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은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양심에 충실하려는 자세다.
우리가 양심을 따를 때 우리의 고결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이들 안에서 그런 고결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큰 감명을 받는다. 이것은 항상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힘을 북돋워준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맞서서 그분의 말씀으로 그 비범한 고결함을 입증하셨다.
경외의 은사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항상 진실할 수 있게 한다. 이 은사는 우리에게 사랑의 진리를 알려주어서, 우리가 자기방어나 안전에 대한 동기로 인해서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한다. 경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두려움뿐 아니라 또한 각자가 스스로 고결함을 지키려는 충성심이기도 하다. 즉, 상황이 어떻든 간에 옳다고 믿는 것을 하는 것이다. 잔 다르크 성녀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종교 재판에서 불의한 판결에 용감하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양심에 대한 충실함이었다.
경외의 은사가 더해갈수록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커간다. 겸손은 우리 자신이 나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심원한 인식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연민에 대한 보다 큰 신뢰이다. 경외의 은사는 이렇게 상반되는 것을 함께 묶어준다.


굳셈

굳셈의 덕은 영적 여정에서 행하기 힘든 선(善)을 추구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굳셈의 은사는 우리를 훨씬 더 멀리 나아가도록 밀어준다. 굳셈의 은사는 영적 성장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주요한 장애물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것은 본성을 엄청나게 강화하는 것이며 굳셈의 주입된 덕을 더욱더 강화하는 것이다.
굳셈의 은사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대중을 사로잡는 훌륭한 사도직으로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일상에서 작은 일에 충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직자의 일이든 수도자의 일이든 주부의 일이든 전문적인 일이든 환경미화원의 일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을 하루하루 잘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방법이 들어 있다. 성령께서는 삶 안에서 거룩하게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 수 있게 하셨다. 성령께서는 삶 안에서 거룩하게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전 존재를 통합하여 영적 여정을 진정으로 추구하려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룰 수 있는 방법들이 매우 소중하고 필요하다.
굳셈의 은사는 힘과 통제하는 본능적인 욕구를 풀어주어, 다른 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게 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비굴한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분노와 적개심에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굳셈의 은사는 우리가 어떤 위험과 반대에 부딪치더라도 굳세게 행하기 힘든 선을 추구하게 한다.
알제리에서 있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7명의 순교자들은 굳셈의 은사의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이다.
그 수도승들은 복음이 우리를 부르는데 네 가지 자유의 정상을 체험했다.
첫째는 고의로 저지르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둘째는 죄의 뿌리, 즉 영성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벗이 되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느님께 사랑받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자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단순한 자유로움이다. 이것은 매순간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유로움으로, 아주 작은 봉사를 할 때나 현재 주어진 소임을 할 때,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그 수도승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의 선택은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움직임이었으며, 더 깊은 차원으로는 그 말씀을 삶으로 사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굳셈의 은사는 서서히 다른 은사와 결합하여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연히 일어나는 분노의 에너지를 하느님을 섬기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 어려운 사도직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며 맞서서 싸우거나 절망감에 빠지는 대신 매일의 삶의 굴곡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은사는 선을 행하고 악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마음과 정신을 확고하게 심어주며 특히 어려움 중에 더욱더 견고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영감은 진복팔단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

효경

효경의 은사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정신과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엄격함을 원만하게 성숙시켜 나가게 한다. 이 은사는 이웃을 친절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참아주며, 쉽게 용서하고,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도록 큰 영감을 불어넣는다.
효경의 은사는 우리에게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와 같은 태도를 갖도록 일깨워 주며, 또한 모든 이들이 형제자매라는 의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비록 그들이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거나 혹은 전혀 종교가 없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을 경쟁자로 여기기보다는 여정의 동반자로 볼 수 있게 한다. 효경의 은사는 분리하거나 구별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전통을 존중하는 마음을 길러주고 현대 문화와 일상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창조성을 길러준다.
알제리의 트라피스트 순교자들이 굳셈의 은사에 범례가 되었듯이, 효경이 은사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그 수도승들은 이슬람 이웃들을 적이나 친구가 아닌 형제자매로 보았지,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킬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곳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또 자신들의 농업 기술을 나누거나,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한 형제자매임을 보여주었다.
효경의 은사는 알제리의 트라피스트 순교자들로 하여금 적까지도 사랑하게 하였고, 자신을 죽이는 자를 미리 용서하게 하였다. 이처럼 모든 사람과 모든 행위에 대하여 완전히 용서하는 태도는 효경의 은사의 가장 성숙한 열매이다. 인류가 한 가족이라는 의식은 관상기도와 그 수련을 통하여 더욱 성장하고, 이러한 일체감은 온 지구상으로, 자연 세계로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산되어 간다. 하느님 안에 만물이 있고 만물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이러한 신적 내재는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인식하게 한다.

의견

의견의 은사는 신중함의 덕을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올린다. 이 은사는 장기간에 걸쳐 해야 할 것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세부적인 면에서도 해야 할 것들을 제안한다.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수록, 성령께서는 더욱더 우리의 삶을 차지하신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는 몸소 우리의 삶을 살아가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많은 잘못을 하지만, 결국에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게 된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긴 여정을 알고 계신다.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분의 계획만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의견의 은사가 주는 영감은 말로 드러나는 것보다 우리 가까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밀하게 현존하시기 때문에 여기에 마음을 열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지속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와 우리 삶의 모든 것과 현실을 동시에 감싸 안으신다. 우리가 하루 종일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관상 기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언자로서의 성령과 관계를 맺을 때 첫 번째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고 고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신다.
의견의 은사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거나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끄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있는 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매우 섬세하게 인도한다. 하지만 때로는 둔감하게 반응하기고 한다.
의견의 은사가 주는 영감은 대체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실제로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한다.
의견의 은사는 융통성이 있고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것은 이 은사의 특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신중하게 세운 계획들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완전히 허물어질 때가 있다.
우리는 신적인 자극에 민감해져야 한다. ‘의견을 구하는 것’은 보통 직접적으로 메시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하는 은사적인 선물인 ‘지혜의 말씀’도 아니다. 의견의 은사는 굉장히 놀라운 일을 겪을 때라도 평화로울 수 있게 하는 섬세한 이끌림이다. 영적 여정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 은사가 주어진다. 식별하기 어려운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많이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행동은 대체로 세 단계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굉장한 노력을 요하는 어떤 일을 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 일이 시작부터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처음 결과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실수 했다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여러분은 다시는 그런 낭패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 단계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것이며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은혜일 수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항상 함께 일어난다. 여러분이 가르치려 했던 것이 한두 명에게 이어져서 그들이 작은 모임의 핵심이 되어 그 가르침은 퍼져나가게 된다. 이것이 은총의 승리이다. 여러분이 처음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실제적으로 실패였고, 또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이 성령으로 축복받은 사명의 시작이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의견의 은사는 인간의 사리 분별대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용의주도한 실천 계획을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이 은사는 영적 여정의 원천이 되어왔던 것과는 모순되는 길을 제안할 수도 있다.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세세한 것들을 그분의 현존 안으로 가져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중요하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의견의 은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혹은 바꿔야 할 것인지에 대한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이다. (이렇게 민감해지기 위해서 내적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
하느님께서는 단지 평화 중에 머물기를 바라시면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반대, 부정, 실패에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인간의 노력과 실패 그리고 은총의 승리는 성령의 역사에 뒤따르는 평범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은총의 승리는 우리의 선입견 때문에 그것을 감지하기 어렵다. 은총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실패의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이며 외적인 성공보다 위대한 승리이다. 실제로 사도직에서 실패한 경험은 장기적인 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의탁이다.

(가장 위대한 성공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 비록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 성령께 의견을 물으면서 계속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지식

지식의 은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창조된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한다. 창조된 세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대체물이 아니다. 창조된 세상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디딤돌이며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
지식의 은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식의 은사는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행복에 대한 깊은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꿰뚫는 직관이다. 지식의 은사는 안전과 생존, 힘과 통제, 애정과 존중이라는 본능적인 욕구에 의해서 일어나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에 쏟는 우리의 에너지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러한 욕구들은 유아들에게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며, 우리가 억압받는다고 느끼는 것만큼 확대되어 간다. 그러므로 보상 과정이 손상될수록 우리는 자신이 속한 문화나 환경 안에서 욕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상징을 찾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거짓 자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과 불행하고도 유치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성공하지 못할 일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곧 절망에 빠지게 되고, 폭격을 당한 것처럼 비참함, 슬픔, 분노, 두려움과 실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욕구, 좌절, 쓰라린 감정의 끝없는 순환이다. 이런 순환은 어떤 이들을 매우 비참하게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거나(냉담),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공격적인 방법을 택하게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의 영은 우리에게 우리의 무절제한 욕구의 좌절로 소진하는 에너지를 볼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원천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친밀하게 그리고 항상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마다 슬퍼한다. 우리가 안전, 애정, 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그것을 갖지 못하거나 절대로 가질 수 없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한탄하게 된다. 지식의 은사가 작용하면 이런 한탄은 보통 슬픔의 감정과는 달라진다. 그것은 오히려 건설적이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행복의 유일한 원천이시라는 사실에 익숙해진 후에는 그런 희망 없는 기대에 쏟을 에너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고, 그럼으로써 평화를 누리기 시작한다.
지식의 은사는 진복팔단의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에 상응한다. 지식의 은사로 인한 슬픔은 ‘회심의 눈물’이라는 아름다운 은총이다. 이러한 회개는 또한 양심의 가책으로도 알려져 있다. 양심의 가책은 실패에 대한 어떤 죄책감 없이 우리의 실패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가 행복한 것은 슬픔의 감정이 희망의 향주 덕으로 인해서 완화되고 균형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은 참으로 실패했을 때의 비탄과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한 한없는 신뢰의 혼합 혹은 완벽한 균형이다. 그러한 균형이 없다면 슬픔은 낙심으로 심지어 절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낙심할 때마다, 특히 우리가 저지른 잘못으로 절망할 때마다 우리는 즉시 희망을 떠올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지식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관상의 은혜 중에서 으뜸이다. 이 은사는 감각의 밤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고통을 주기 위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서 프로그램을 상대화함으로써 우리를 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감각의 밤은 이런 점에서 고통스러운 것이지, 하느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 벌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느님의 영은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을 떠나보내도록 하는 우리의 노력은 서둘러 도와주신다.
지식의 은사는 또한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우리가 하는 역할에 우리 자신을 과잉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떠나기를 촉구한다. 이런 예는 복음서 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행적들 안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묶여 있었던 사회적 상황이나 조건들을 예수님께서 허물어 버리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녔던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대리자로 드러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관점은 세속적이었고, 종교의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이 사회적 혹은 정치적인 신분 상승을 위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낡은 프로그램에 종교라는 옷을 입혀 조장한 것에 불과했다.
지식의 은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창조물에 대한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이 느끼더라도 창조물의 선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창조물의 목적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게 되고, 그러한 지식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지탱해준다. 이러한 계시와 함께 지식의 은사의 주요한 활동은 창조물 안에서 심지어 가장 미세한 창조물 안에서도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지식의 은사는 가장 미천한 것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지식의 은사의 좋은 범례이다.

깨달음

깨달음의 은사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다. 이 은사는 기도 중에 올 수도 있고 기도 시간 밖에서 올 수도 있다 깨달음의 은사가 주는 영감은 일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인상이나 통찰이다. 깨달음의 은사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중요한 진리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밝히 드러낸다.
깨달음의 은사는 계시된 진리가 의미하는 바를 신앙으로 완전하고, 깊게 하며, 빛을 비추어 주고, 우리가 동의하는 신비를 더 깊이 깨닫게 해준다. 예를 들어 그것은 거룩한 삼위일체나 하느님의 엄위하심의 일면일 수 있다. 그것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일 수 있다. 그것은 고해성사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일 수 있다. 다른 말로, 그것은 단지 우리가 믿고 동의하는 것에 대한 확언이 아니다. 깨달음의 은사의 특성은 살아 있는 신비 체험이다. 한두 번 체험한 이런 깨달음은 인생에서 지속될 수 있으며, 우리의 영적인 삶 전체를 완전히 재구성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깨달음의 은사는 진복팔단의 깨끗한 마음에 상응한다. 깨달음의 은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깨달음의 은사는 신앙의 진리를 꿰뚫어 보게 하는 통찰력을 주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현실적으로 보게 한다. 이 은사가 활짝 피어나면,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체험과 함께 우리 스스로는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도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과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겸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그것은 동시에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에 불굴의 희망을 거는 것이다.
깨달음의 은사는 주로 영의 밤 안에서 작용한다. 영의 밤 안에 우리는 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격렬한 고통의 기간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격려 받으려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언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영의 밤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가장 깊은 차원에서 회의가 일어나고 우리 자신 안에서 엄청난 타락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누룩의 비유(마태13,13이하)가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고 심지어 도덕적 타락 가운데도 있다.
성령의 정화된 사랑으로부터 우러나는 내적 자유가 무엇이든 그것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며, 우리 자신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외적인 일을 합쳐 놓은 것보다 위대하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느님의 정화된 사랑에 승복함으로써, 성령께서 점차적으로 우리를 구원의 신비 안에 통합시켜서 하느님 현존의 성사가 되게 하고 신성한 은총의 전달자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깨달음의 은사에 대하여 통찰을 하게 되면 우리는 영의 밤으로 들어가게 된다. 보통 관상 기도는 우리를 이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련을 하느님의 벌로 해석한다. 이것은 오해이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명확히 밝히고자 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란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충만함 안으로 들어가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치유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의 은사는 우리를 영의 밤으로 들여보내서 견디어내게 한다. 이것은 진복팔단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지혜

지혜의 은사는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하고, 현실에 대한 신성한 시각을 불어넣는다. 그럼으로써 사건을 꿰뚫어 보게 되고, 심지어 매우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깨닫게 된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지혜의 은사의 높은 차원이다. 이런 시각으로 배워야 할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다. 지혜의 은사는 진복팔단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원천이다. 그 사람들은 그들의 훌륭하고 다양한 능력들을 하느님의 지시와 영감에 복종시켜 일치를 이루어간다. 그들은 그들 주위에 -가족, 공동체, 직장, 어디에서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지혜’라는 말은 라틴어 ‘sapientia'에서 유래한다.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맛있다‘이다. ‘sapientia'는 실제로 ’지식을 맛봄‘을 뜻한다. 지식은 즐거운 것이다. 개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과일을 맛보는 경험과 같은 것이고, 사전을 읽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경험이다.
하느님을 맛보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대답은 “예”이지만, 우리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장애물을 줄임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의 동기를 정화시켜 하느님 사랑의 활동을 허용함으로써 스스로를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지혜의 은사는 기도 시간에 충만한 통찰, 기쁨, 심원한 침묵을 맛보거나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은사는 개인적인 체험으로서 하느님의 현존 신비를 전달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종식시킨다. 그 의심은 거부감, 자기 존중의 결핍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가 초기 유년기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다.
지혜의 은사의 한 가지 특징은 비록 일시적으로 드러날지라도 영구하다는 점이다. 영구한 은사로서 이 지혜의 은사는 지성과 의지와 그 영감을 나눈다. 이 은사는 의지에 뿌리를 두고 사랑으로 자라난다. 사랑은 자비와 기도에 대한 충실한 행위의 결과로서 자라난다. 사랑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기꺼이 용서하지 못함, 원한을 품고 있는 마음, 화해하기를 거부함 같은 심각한 장애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다른 죄보다 더 사랑에 방해가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포기하게 하며 그리고 매우 강력하다. 관상 기도는 서서히 우리를 사랑의 물결 안으로 끌고 간다. 그 사랑은 삼위일체의 위격 사이에, 그리고 피조물 안에서 강생을 통하여 특별히 인류 가족 안으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은총은 계속해서 우리를 그 물결 안으로 더 깊이 이끌어 준다. 마침내 자신의 발판을 치워버리고 물결을 따라 갈 때 신적인 일치 안에 잠기게 된다. 우리 삶의 동기와 모든 활동은 이 일치에 근거한다.
지식의 열매는 인간사와 관련이 있다. 지혜는 하느님이 함께하는 것이다. 신적인 신비의 측면에 대한 통찰, 즉 하느님의 자비, 부드러움, 관대함은 지혜의 은사의 열매들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주어 일상 안에서도 우리를 이끌기 시작한다.
지혜의 은사의 특징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시는가를 보여준다. 지혜의 은사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한다. 지혜의 은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크심을 생각하게 하고, 그분을 항상 더 크게 생각하도록 영감을 준다. 우리가 이런 깨달음에 의해서 행동할 때, 우리는 감히 상상해본 적이 없는 도전을 하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클수록, 우리는 더 하느님의 봉사 안에서 관대하게 행동할 수 있다.
지혜의 은사의 활동성은 우리 안에 평화를 이루고 우리의 모든 능력에 질서를 주며, 또 그것들을 하느님이 거하시는 우리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연결시킨다. 이 평화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 평화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평화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복팔단에는 이렇게 선언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시이다. 성령께서는 열매를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체(實體)가 된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열매들이 드러남으로써 우리는 가장 심원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된다. 그것은 성령 안에 우리의 뿌리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족, 친구,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삶을 전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 뿌리를 둔다면 이런 열매들은 반드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정화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영적 작업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온전히 성령께 의탁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활동의 모든 차원에서 그 원천이 되시고자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계획에서 나오도록 부르신다. 우리가 성령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나약하고 덕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들일 때마다 내적 부활이 따른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를 체험함으로써 드러나는데 이런 열매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되어 간다는 첫 번째 표시이다.
우리 인생 역사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은 우리의 신체와 신경 조직 안에 기록되어 있다. 살아오는 동안 소화되지 않은 정서적인 것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무의식에서 드러나는 은총과 본유적이고 영적인 에너지가 자유롭게 흘러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에너지들은 사랑, 기쁨, 평화, 친절, 인내, 믿음, 온유, 그리고 절제라는 특성으로 드러난다.
성령의 열매들은 그리스도 마음의 아홉 가지 측면이다. 이 열매들은 세례와 견진성사의 은총으로 활성화되고 성장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거짓 자아의 쓴 열매 즉 음행, 방탕, 악의, 분쟁, 시기, 싸움, 당파심, 질투와는 정반대다. 성령의 열매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향주 삼덕과 함께 성장한다. 진복팔단은 성령의 열매가 무르익어 변형된 것이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인데 이기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이타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대체로 우리들은 사랑은 어떤 것이나 누군가를 갈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랑을 그리스어로 에로스(Eros)라고 하는데, 이런 사랑은 매우 힘이 있고 필요한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성장해 나가야 그 의미가 있다. 이 사랑은 자선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과거의 습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서 한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믿음은 다른 사람 안에서 드러나는 성격상의 결함이나 성품의 부족함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게 한다. 이 사랑의 성장은 하느님을 향한 자기 승복에로 이끌며 다른 이들에 대한 연민 가득한 사랑에로 이끌어 준다. 그 사랑에 생명력을 주는 원천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특성이다. 끊임없는 애정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 사랑의 보상이다.
예수님의 두 번께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모든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근거한다. 우리는 대하기 힘든 사람이 있으면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그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사람들을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노력은 진리 위에 기초한다. 우리는 그것을 당장 눈이나 느낌으로 알 수는 없지만 오직 믿을 뿐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면 성령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는 새 계명을 주셨다. 이 사랑의 길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 길은 단순히 추상적인 믿음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성, 확고부동한 자기 의견, 한계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들,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으로 혐오감 같은 것들을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한계, 과오, 죄, 장애를 지닌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 흘러넘치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심지어 반대나 박해를 당하더라도 끊임없이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그 사랑은 관상기도의 침묵이라는 못자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주입(注入)된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기쁨이다.
기쁨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체험에 근거를 둔 영원한 행복감이다. 이것은 나를 자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표시이고 참자아가 성장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기쁨에 넘쳐 우리는 자유롭게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된다. 지복직관은 충만한 기쁨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존재라는 의식이며, 그분의 영원한 현존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의식이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신적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체험하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성령의 세 번째 열매는 평화이다.
평화는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우러나서 스며드는 만족감이다. 동시에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완전한 자각이다. 그것은 인생의 굴곡과 기쁨과 슬픔의 정서를 넘어선 상태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모든 것은 온전하고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성령의 네 번째 열매는 유순함(친절)이다. 유순함은 적개심, 증오, 성냄의 에너지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분노는 인간 건강과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힘껏 선을 추구하여 보존하려는 능력, 특별히 영적 여정의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선과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선을 추구하여 보존하려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유순함의 성장은 우리를 열어 하느님 현존하심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게 하며, 한계를 지닌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회가 될 때마다 도와주어야 하며 그들을 변화시키려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진보를 위해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하느님께 점점 더 의탁하게 되면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된다.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는 신실함(충실)이다.
신실함은 유순함의 역동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활동을 매일 봉헌하는 것이다. 그러한 봉헌은 다른 이를 위한 연민으로 드러나며 특별히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나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봉사하는 것이며, 어떤 보상도 받으려 하지 않고 끈기 있게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상적인 요구가 새로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점차적으로 감소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자라난다.

성령의 여섯 번째 열매는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일을 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온유하고, 확고하며, 힘들이지 않고 창조물의 거대한 다양성으로 모든 창조물을 지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수고하며 하느님께 봉사하지만, 그러나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우리와 다른 이들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경험으로, 심지어 쓰라린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도 하느님께서 결실을 거두어주지 않으시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영, 질투, 다툼 - 이러한 것들은 심지어 영적 노력에도 동반되는데 - 은 점차적으로 비워지고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무한한 자유와 우리 주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봉사하려는 자유로움만 남게 된다.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는 선행이다.
선행은 우주와 모든 창조물과 하나 된 의식으로 창조물의 선성(善性)을 확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 안에서 심지어 삶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을 감지하는 성향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는 결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흘러넘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와 일상의 피로와 눈물들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게 된다.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는 인내이다.
인내는 하느님께서는 약속에 변함없이 충실하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소유하고 이루어 놓은 것에 안전의 근거를 두지 않고, 우리를 다함없이 보호하시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께 그 근거를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사의 흥망성쇠에 방해받지 않으며 거기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인 반응에 좌우되지 않는다. 느낌은 계속되고, 때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지지만 그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의식과 활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상황 안에서 특별히 오래 지속되는 메마름과 어둔 밤을 하느님 구원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복음서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청하여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이다.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우리의 의지로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고, 하느님의 확고한 사랑이 주입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안전, 애정과 존중, 힘과 통제를 얻기 위하여 손을 뻗치는 과거의 강압은 끝을 맺게 된다. 특별히 위탁과 진정한 사랑을 배제한 성적 활동을 위한 에너지가 없어진다. 모세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여쭈었을 때, 들려온 대답은 “나는 있는 자 그로다”(I AM THAT I AM) 이었다. 여전히 이 구절은 학자들의 연구 과제이지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너를 위한 존재다”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내적 확신은 우리의 선택과 활동의 자유를 강화시킨다. 절제는 내적인 자유로부터 자발적으로 우러나온다.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온갖 시련과 유혹을 통하여 우리를 굳세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성령의 열매들은 복음의 새 포도주이다. 이 포도주는 신적 에너지와 확신에 찬 자발성으로 우리를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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