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 말은 사람들이 주님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함께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주님과 식사를 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던 모양입니다.
주님과의 식사가 너무도 행복하여
천국에서 식사를 하는 행복을 떠올릴 정도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러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되면
마치 천국의 만찬을 나누는 것 같은 행복감이 가득차지요.
가장 행복한 만찬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누구와 식사를 하면 천국의 식탁이 되겠습니까?
그와 식사를 하며 포도주까지 한 잔 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가 누구입니까?
그와 식사를 하면 천국의 식탁이 되는데
정작 천국의 주인이신 분과 식사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까요?
이에 대해 오늘 주님께서는 천국의 식탁을 좋아할 것 같지만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비유로 답하십니다.
비유에서 천국의 식탁을 거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다 이제 막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밭을 샀는데 그것을 이제 보러가야 하고,
겨릿소를 샀는데 이제 그것을 부려봐야 하고,
방금 장가를 들었으니 색시에게 사랑을 다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식사하자면 하던 것 그대로 두고 달려올 텐데
하느님께서 식사하자시니 않던 일을 시작합니다.
천국의 행복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최고의 행복을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천국의 행복을 맛 본 적이 없고
실제로 하느님 사랑을 맛 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사랑과 모르는 행복에 모험을 걸기보다
경험하고 익숙한 사랑과 행복에 머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게지요.
고백을 하자면 저는 참으로 모순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하고픈 일이 너무도 많아서 지난 일을 기억치 못하고,
우리의 낡은 사고방식이나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매우 진보적인 것인 것 같은데
의외로 저는 새로운 음식을 맛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가본 곳을 별로 가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나이를 먹으니 더 그러합니다.
그러니 제가 찾는 새로움과 미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한 새로움>
다시 말해서 익숙한 것의 새로운 모습일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것을 전부 부정을 해야 하는
그런 천국, 그런 미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천국이라도 멈칫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이 세상에서 새로운 미래를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 <익숙한 새로움>이 아니라
아오스딩 성인이 말씀하신 <오랜 새로움>을 살게 하소서.
내 입에 꿀 보다 더하나이다.(시119;103)
이 비밀 더욱더 사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