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러고 보니 제가 유다서를 가지고는 한 번도 강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괜히 유다 사도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어
오늘은 유다 서간의 말씀을 가지고 묵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막상 묵상하고자 자세히 들여다보니 말씀과 표현들이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유의미 했습니다.
우선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을 생각해봤습니다.
여기서 의심하는 이들이란 나를 의심하는 이도 되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교회를 의심하는 이가 되는데
아무튼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한 5년 전부터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자비>입니다.
저에게 딱 맞는 말이기도 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때 이후 저는 청원기도를 하면서
누구는 이러하니 이런 은총을, 누구는 저러하니 저런 은총을
일일이 제가 지목하여 기도하거나 구질구질 길게 기도하지 않고
그저 제게나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라고 아주 초 간단 기도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한 5년 전부터 이 표현을 좋아하기 시작했을까요?
그것은 제가 전보다 훨씬 겸손해졌기 때문인데
이는 저를 자랑하는 뜻이기보다는 제가 제 꼴을 더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제가 죄인이고 여러 면에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자비란 일반적인 사랑보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며
불쌍한 사람 중에서도 가난하거나 병들어 불쌍한 사람들보다는
인간이 구겨졌거나 죄인인 불쌍한 사람,
그래서 사실은 사랑하기 어려운 불쌍한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지요.
오늘 유다서에서 불신하는 이나 불에서 끄집어내줘야 할 사람도
우리 교회의 입장에 볼 때는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이단이어서
지옥 불에 떨어질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라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할 사람일지라도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워하는데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 가능한 말인지
당장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아무튼 자비란
미워하지 않고 불쌍하게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솔직히 저를 고백하자면 제가 작년부터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우리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파견된 선교사들로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선교 특강을 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남들에게 말하면서 정작 저는
못된 짓을 하여 미운 사람에게는 복음도 전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어떤 못된 사람은 순간 지옥이나 떨어지라고 하고픈 사람이 있는데
즉시 아무리 밉기로서니 지옥에 떨어지길 바랄 정도로 미워해서 되나 하고
비 복음적인 자신을 먼저 반성하고 다음으로 더 이상 미워하기보다는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가련한 그를 불쌍히 봐야 되겠지요.
이런 뜻에서 어떤 이들은 그의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라는 말씀이 오늘 너무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지옥에 떨어지기를 바랄 정도로 미워하는 자신으로 머물까 두려워하며
다른 한 편 미움을 능가하여 불쌍히 여기는 자비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