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보면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라고 하시는데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그 뜻이 무엇입니까?
유일신唯一神 신앙에서 이 유일唯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잡신은 많아도 우리의 하느님과 같은 신은 또 있지 않고
오직 한 분뿐이시라는 얘기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 얘기는 또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분도
우리의 하느님 한 분뿐이시라는 얘기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분 따로 있고,
한국인을 창조하신 분 따로 있으며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이 따로 있고,
다른 피조물을 만드신 분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창조뿐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도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럼에도 한 분이신 분이 “우리”라고 하신 것은
한 분이신 분이 결코 혼자가 아니시라는 얘깁니다.
이 얘기는 당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지만
당신 내에서는 다른 신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구약에서 “당신밖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는 말의 뜻이고,
이것이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은 이것을 신적 사랑 안에서 설명합니다.
신적 사랑의 본질은 하느님께서는 하나이면서 셋을 이루고
셋이면서도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적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사랑이시기에 삼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사랑을 하실 때 아무도 없이
당신 혼자서 어찌 사랑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사랑할 대상이 없이 어찌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사랑하시는 하느님(성부)과
-사랑 받으시는 하느님(성자)과
-두 분 사이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성령)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사랑할 때도
사랑하는 내가 있고 사랑 받는 내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이시기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그래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기에 완전히 하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당신 안에서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시고, 셋이서 하나를 이루시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삼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삼위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삼위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보살피십니다.
완전한 비유가 될 수는 없지만
부모의 사랑이 완전할수록 그 사랑은 부부 사이의 사랑에 그치지 않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도 완전하고 충만하기에
그 사랑은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창조와 다스림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부부 간의 사랑이 완전할수록 자녀 사랑에서도 역할의 조화를 이뤄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사랑을, 어머니는 어머니다운 사랑을 하고,
그리 함으로써 자녀들이 더 완전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성자와 성령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자께서는 길이요 진리로서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로 나아가게 하시고,
성령께서는 성자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심을 깨닫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자께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