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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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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을 네 번째 이야기

 

프란치스코의 삶도 그가 모든 결과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형제회가 미래에 어떻게 자랄지 알지 못했고, 자신의 작은 선택이 수백 년 뒤에도 사람들에게 복음의 길을 보여 줄 것이라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살았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우리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보장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선을 행하고, 결과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이것이 내적 가난이며 선교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결과를 소유하려 할 때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그의 변화 속도를 통제하며, 원하는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관계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의 계획보다 길고, 한 사람의 영혼은 우리의 일정표에 맞추어 자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다립니다. 변화가 더디더라도 기다리고, 내가 기대한 응답이 오지 않아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성이 아니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충실함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오래 듣고, 갈등과 불의의 현장에 머물며, 변화가 보이지 않는 일을 지속하다 보면 마음이 메마르고 지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견은 언제나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오는 길을 포함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것과 기도로 돌아오는 것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기도는 파견의 샘이며, 파견은 기도가 몸을 얻는 자리입니다.

 

형제들은 길을 떠났다가 다시 작은 성당으로 돌아와 함께 기도하고 빵을 나누며 자신의 실패와 기쁨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형제들의 품 안에 내려놓고, 다시 말씀을 들으며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일하다 지치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멈추면 모든 일이 무너질 것 같고,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못할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감처럼 보이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일에 잠시 참여하는 작은 도구입니다. 우리가 쉬어도 하느님께서는 일하시고, 우리의 한계 너머에서도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안식은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멈추고 기도하며, 형제들과 함께 머물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간은 다시 사랑할 힘을 얻는 은총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계속 내어주는 삶은 결국 타인을 향한 분노와 메마름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적 자기 비움은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믿기에 자유롭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을 줄 아는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형제의 위로를 받고,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힘을 얻으며, 하느님의 침묵 안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오래 줄 수 없습니다.

 

기도와 형제성과 사명은 하나의 흐름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형제성 안에서 그 사랑을 나누며, 세상 속에서 그 사랑이 더 넓게 흘러가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만난 사람과 피조물의 이야기를 다시 기도 안으로 가져와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흐름이 멈추면 영성은 메마릅니다. 기도만 있고 세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사랑은 자기만족이 되고, 활동만 있고 기도가 없으면 사명은 자기 의지와 소진으로 변합니다. 형제성 없이 혼자 세상을 구하려 하면 우리는 자신을 중심에 세우고, 공동체를 잃은 영웅주의에 빠집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이 세 흐름이 하나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형제와 빵을 나누며, 다시 세상으로 파견되고, 세상에서 돌아와 모든 것을 감사와 찬미로 봉헌하는 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 800주년을 기억하며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내세워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갖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했던 방식으로 오늘의 상처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나병 환자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고,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며, 존재 자체로 불편함을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난과 질병, 장애, 나이, 출신, 중독, 실패와 낙인 때문에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무너진 성당은 어디입니까? 신뢰를 잃은 교회, 상처로 갈라진 공동체, 대화가 끊긴 가정, 경쟁과 효율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 탐욕으로 파괴된 땅과 물이 무너져 가는 하느님의 집이 아닙니까? 오늘의 술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적으로 규정하고 만나기를 거부하는 사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의 얼굴을 지워 버린 사람, 서로의 언어가 달라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넘어가야 할 경계 너머에 있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를 기념한다는 것은 오늘의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고, 오늘의 무너진 성당에 돌 하나를 얹으며, 오늘의 적대의 경계를 넘어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가 살았던 가난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안전과 소유를 움켜쥐고, 그의 평화를 노래하면서 관계 안에서는 날카로운 말을 사용하며, 그의 피조물 찬가를 암송하면서 자연을 함부로 소비한다면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의 길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선종 800주년의 참된 기념은 행사의 크기에 있지 않고 회심의 깊이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닫힌 문이 열렸는지, 얼마나 화려하게 프란치스코를 말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와 피조물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칸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작음과 가난과 평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잊혀도 관계 안에 선이 흐르고, 우리가 주목받지 않아도 한 사람이 살아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화려한 성공을 요구하지만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에 충실하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작은 몫, 아픈 형제를 병원에 데려가는 작은 몫, 홀로 식사하는 이의 곁에 앉는 작은 몫,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작은 몫, 오래된 갈등 속에서 먼저 사과하는 작은 몫,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는 일을 조용히 하는 작은 몫입니다. 이 작은 몫들은 세상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바쳐질 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됩니다. 작은 포르치운쿨라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이 세상으로 번져 갔듯, 한 사람의 진실한 회심은 수많은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해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맡겨진 작은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늦게 피는 꽃이 오래가듯, 눈에 띄지 않는 충실함이 시간이 지나 더 깊은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는지보다 얼마나 충실히 사랑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큰 업적을 세웠는지보다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었는지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파견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통하여 나의 선함을 증명하려 하는가. 나는 정의를 위하여 일하는가,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써 우월감을 얻는가. 나는 가난한 이의 목소리를 듣는가, 아니면 그들의 이름을 빌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선한 일 안에도 거짓 자아가 숨어들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 인정받고 싶고, 정의를 말하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싶으며,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내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에는 끊임없는 자기 인식과 회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만큼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를 살펴야 하고, 일이 잘되었는가만큼 관계 안에서 누가 상처받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과 자유와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두려움과 압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목적이 선하다는 이유로 복음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과정 안에서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정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사람의 존엄이 지켜져야 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약한 이가 희생되지 않아야 하며, 선교의 열매를 위하여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과정의 선이 결과의 선으로 흘러갈 때,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선한 결과를 위하여 사람을 조종하고, 형제를 소진시키며, 피조물을 파괴한다면 그 결과는 복음의 열매일 수 없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에게 느림을 가르칩니다. 세상의 문제는 빠른 해결을 요구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관계의 회복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받은 이에게 빨리 회복하라고 재촉하고, 가난한 공동체에 우리가 정한 속도로 변화하라고 요구하면 우리는 다시 그들을 통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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