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늘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해봤자 소용없고 쓸데없기 때문이고,
고통을 줄 뿐이고 행복을 밀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걱정이 한가득하다고 하지요.
걱정이 한가득하면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행복도 밀려나면서 불행감 비슷한 것이 대신 자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야 할 첫째 이유는 쓸데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쓸데없는 것에 밀리어 행복의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인간적인 이유일 뿐이고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신앙적인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표시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지 않기에 걱정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을 믿는다고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께서 뭘 먹고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사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헐벗고 굶주리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식주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믿어도 헐벗고 굶주림이 있을 수 있다면 믿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지만 안 주실 수도 있으며
주시고 안 주시는 것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안 주시는지 모르지만 안 주실지라도
주실 때와 마찬가지로 선의로 안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선의와 사랑을 믿는 것이고,
이렇게 믿을 때 또 그 뜻에 순종할 때 걱정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선의는 믿어도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거나
믿음의 자세가 너무도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가 밥을 안 준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랑의 이유로 곧 나를 위해 안 주는 것인데 굳이 먹겠다는 것은,
그 뜻을 거스르는 것이요 그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프란치스코도 그렇지만 클라라는 이런 믿음의 모범입니다.
클라라에게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었기에
극도의 가난과 고통 중에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는 가난,
주지 않으셔도 걱정하지 않고 기뻐하는 가난이 부럽고,
그런 가난을 살 수 있는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