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반하게 하는 그릇된 신념을 넘어
신념윤리
신념윤리는 행위의 결과나 효용성보다는 행위를 하게 된 동기나 신념, 즉 행위자 내면의 순수한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 관점입니다. 다른 말로 동기론적 윤리라고도 불립니다.
신념윤리와 결과윤리
신념윤리는 종종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결과윤리와 비교됩니다. 신념윤리는 "좋은 의도로 한 일은 그 자체로 옳다."라고 말하며 결과윤리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가 옳은 행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과나 의도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변화의 과정을 살아갑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신념윤리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동기에 그치지 않고, 그 근원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틀로 만든 종교심을 신앙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올바른 행위의 동기는 세속적 가치에서 나오는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신앙인에게 신념윤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해드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며, 아버지의 뜻이 나를 도구 삼아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동기가 무엇보다 우선하며 중요합니다. 신앙인들이 선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그 행위가 가져올 좋은 결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가치에서 나오는 신념윤리는 행위의 가치를 결과의 유불리가 아닌,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에 둡니다. 신앙인에게 이 절대적 가치는 곧 신의 명령이며,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순교의 영역에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비난과 십자가의 형벌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셨습니다.
신앙인에게 양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놓으신 명료한 가치이며 단순히 개인적인 도덕 기준이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듣는 통로로 여깁니다. 따라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곧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므로, 그 행위가 초래하는 현실적 결과와 관계없이 올바른 것으로 간주 됩니다.
신앙인은 행위의 결과가 예상과 다르더라도,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으며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또한 인간에게 부여 된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태도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훌륭한 신앙인은 신념을 지키면서도 세상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신심을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안에서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신념화 하는 위험성은 매우 큽니다. 신앙생활에서 신심(信心)을 중시하는 이들이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신념화하는 것은 매우 흔하면서도 위험한 함정입니다. 이는 본래 신앙의 근본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만족과 과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위험성의 근본 원인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발생합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많은 양의 기도문을 바치고 교회 봉사나 선교 활동, 헌금 등 신앙적 행위의 동기가 신에 대한 순수한 믿음에서 벗어나 타인의 평가와 인정, 칭찬을 기반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장과 성공의 신념화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진척을 눈에 보이는 '성과'로 측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면의 동기들이 보이기 위한 것들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기도 모임에 참석한 횟수, 성경을 완독한 횟수, 혹은 교회에서의 봉사 직분을 맡은 것이 마치 자신의 영적 성숙도를 증명하는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표들을 자신의 신앙적 신념으로 굳게 믿게 되면, 진정한 내면의 변화보다는 외형적인 모습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광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종교적 광신은 믿음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 의(義)로움의 덫이라고 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양의 기도와 희생을 하고 돈도 많이 내며 교회 봉사에 앞장서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큰 위험은 이렇게 자신의 공로를 신념화하면서 '자기 의(義)로움'에 빠지게 되면 내가 나에게 반하게 됩니다. 내가 나에게 반하게 되면 자신을 다른 사람 위에 올려놓게 됩니다. 이는 흡사 "나는 이만큼 열심히 했으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신앙의 핵심이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력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거나 정죄하는 교만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애게 와서 배워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함은 하느님의 신적 동등성을 포기하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동등성을 선택하신 육화의 겸손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능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내 것은 “악습과 죄”밖에 없다고 하신 성프란치스코의 말씀처럼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노력을 내세우기보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동기의 성찰로 자신이 왜 그 일을 하는지, 그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어봐야 합니다. 외부적인 인정이나 성과가 아닌, 오직 예수님을 따르고 닮으려는 노력인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에 굴복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행위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구원은 무엇을 바쳐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받아서 얻는 구원입니다. 내 신앙의 중심이 공로가 아닌 선물에 있음을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행위를 자랑이 아닌 기쁨과 감사의 표현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진정한 믿음은 외적인 업적이나 공로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에 감사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가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인과응보와 종교심이 만든 신념은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인과응보'와 종교심이 결합 된 신념이 자신을 우상화하는 위험성은 종교심리학과 철학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입니다. 이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신념이 어떻게 교만과 독선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과응보와 자기 우상화가 결합 될 때 인간은 독선과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인과응보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적 맥락에서는 개개인의 행위(선행 또는 악행)가 미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윤리적 틀을 제공합니다. 이는 원래 책임감 있고 선한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긍정적인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특정 종교적 신념과 결합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우상화하는 위험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영적 자만심,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태도가 생깁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평안을 오직 자신의 선행과 노력의 '업적‘으로만해석하며, 마치 하느님의 은총이나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믿게 됩니다. 이는 '나는 너희와 다르고 내가 너보다 더 낫다'라는 우월감과 교만한 태도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인과응보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그 사람의 죄나 부족함 때문'이라고 쉽게 판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보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동정심을 잃고 정죄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종교가 본래 추구하는 자비와 사랑과는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구원이나 축복이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무상성과 보편적 진리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자신의 공로를 신념화하는 사람은 이 '은혜로운 선물'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스스로의 노력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자신을 은혜의 수혜자가 아닌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본당에 가면 이러한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간섭하고 비난합니다. 설치는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미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자격을 받은 것도 아닌 데 스스로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지시하고 명령하고 지배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신념윤리를 신앙인의 관점에서 가장 순수하게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삶은 결과나 업적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 즉 절대적으로 말씀에 굴복하고 따르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처음에는 가난을 통해 자유를 얻는 길을 발견하였으며 후에는 자유롭기 위해 가난을 선택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적인 삶을 보장받았지만, 어느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재산을 버렸습니다. 이 행위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재산을 활용해 더 많은 사람을 돕거나 교회를 지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러한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자기의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순수한 신념의 발로였습니다.
성프란치스코는 그의 유언에서 나병 환자와의 만남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역겨움이라는 혐오를 넘어선 사랑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신념윤리는 나병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사회적으로 가장 혐오받는 존재였고, 그들을 돕는 것은 명예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찾아가 봉사하고 직접 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이 봉사는 타인의 칭찬이나 인정이라는 외적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혐오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사랑이라는 순수한 동기만으로 행동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동기의 순수성을 찾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지니라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어 맡기려는 태도와 순수한 동기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업적이나 공로를 신념화하는 위험성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행위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에 대한 응답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룬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았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렸습니다. 이는 자기 우상화의 유혹을 물리치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의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을 따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념은 이 세상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선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깊은 만족이 나오고 깊은 만족은 기쁨과 자유와 평화로 세상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