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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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6-37)
안식일에 시작된 새 창조
루카는 옛 창조가 끝난 때에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자, 주님께서 거룩한 치유 행위를 안식일에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율법 아래가 아니라 율법 위에 계시며, 율법을 폐지하는 분이 아니라 완성하는 분(마태 5,17 참조)임을 보여 준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네"(시편 33,6)이라고 쓰여 있듯이, 세상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런즉 율법은 폐지되지 않고완성되며,그로써 잘못되었던 인류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사도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9-10; 참조: 에페 4,22.24). 그분께서 안식일에 일을 시작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창조주임을 보여 주신 것은 적절했습니다. 그분은 이 일과 저 일을 엮어서, 당신이 이미 시작하신 일을 마침내 완수하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우리 주님이 “서로 사랑하시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나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1요한 4, 16). 여기서 요한은 아주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내가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는데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모든 것이 갈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면, 나는 하느님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은 나보다 더 높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 당신께서는 저더러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건만, 저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점에 대하여 아주 적절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합니까?’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요한 21,15). 주님, 당신께서 내게도 똑같은 물음을 던지신다면,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내게 그와 같은 물음을 던지시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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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는 동물들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어딘가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한 마리의 개와 한 명의 아이에게서 배운 것을 예로 든다. 그는 이들에게서 에너지와 존재를 깊이 공유하는 것을 배웠다고말한다.
“내가 사막에 홀로 있어 두려움을 느낀다면, 나는 한 아이가 나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는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합니다. 나와 함께 있어 줄 아이가 없다면, 나는 적어도 한 마리의 동물을 데라고 가서 위로를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검은 표지의 책 속에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자들이여, 그대들을 돕도룩 한 마리의 동물, 한 마리의 개를 데려가십시오. 그러면 그 동물 안에 있는 생명이 그대들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이는 평등이 만물에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명 자체의 힘”과 “만물에게 힘을 주는” 평둥에 대한 탁월한 증언이다. 이 증언으로 엑카르트는 만물의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만물이 평등한 까닭은 그들이 하느님, 곧 존재의 신성한 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엑카르트의 이 이야기를 한 젊은 목사와 함께 나눈 적이 있다. 그가 답례로 해 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 부부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을 아주 싼값에 장만했다고 한다. 그 집에 입주한 첫날 밤에 그들은 두려움과 기분 나쁜 느낌 때문에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밖으로 나가 지신들의 어린 아기를 안고 와서 자신들 사이에 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그날 밤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기가 그들과 그들의 새집에 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하다.
우리가 다른 피조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근원과 그들의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을 낳을 때, 아버지께서는 나도 낳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흘러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뿌리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공통 조상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고 만물의 형제애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느끼고 인식한다." 존재의 원 안에서, 중심점은 원둘레의 다름 모든 점과 같은 거리에 있다. 이 중심점이야말로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존재의 원초적 근원이다. 엑카르트는 인간 우월주의와 생물 우월주의를 배격한다. 그는 피조물 전체가 신적인 평등을 똑같이 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평등하다. 실로 이 평등은 하느님이 자신을 비웠기에 기능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