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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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마태 20,24)
두 형제와 열 제자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두 제자가 세속적인 마음에서 특별한 지위를 청했던 것처럼, 그 지위를 약속받지 못해 열 제자가 슬퍼한 것도 세속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두 형제가 영적으로 이해했더라면 다른 사람들 윗자리를 청했을 리 없는 것처럼, 열 제자도 다른 사람들 윗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영적으로 이해했다면 슬퍼했을 리가 없습니다. 남 위에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비난받을 만한 일이지만, 남을 자기보다 높이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오, 온 세상의 잘못을 고쳐 준 유익한 잘못이여!
사도들이 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므로 소원으로 품기에 좋아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어디서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을 소망하는 것은 탐욕과 도둑질처럼 나쁘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첫 자리를 탐하는 것은 허영입니다. 선행은 우리의 의지와 활동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보상도 우리가 받지만, 첫째 자리를 쫓는 것은 하느님의 판단에 끼어드는 짓입니다. 첫째가는 영예로운 자리를 우리 스스로 쫓는다면,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의로움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이와 똑같은 사건이 모세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시나이 산에서 40일간 단식했지만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참조: 탈출 24,18: 34,28). 그는 단식 마지막 날에도 첫날만큼이나 튼튼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감각을 여의고, 우리의 모든 힘을 안으로 돌리고, 만물과 우리 자신을 잊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성의 대가는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뜬 바깥 일을 멀리하여라! 내적 상념의 격랑을 피해 숨어라. 내적 상념은 평안을 갉아먹을 따름이니." 그러므로 영혼은 잠잠히 평화 속에 머물러 하느님이 영혼 안에서 말씀하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만 하느님은 자신의 말씀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영혼 안에서 선포하십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상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만이 있어야 합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상이나 닮은 모습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선이자 진리이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자신의 안과 밖에서 한순간에 이루십니다.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만물을 지으실 때, 어느 날은 이것을 지으시고, 다음 날에는 저것을 지으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셰는 그런 식으로 묘사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를 다른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이 뜻을 품으시고 말씀하시자, 만물이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만 행동하셨습니다. 하느넘은 수단이나 상에 의지하지 않은 채 영향을 미치십니다. 여러분이 상을 여의면 여윌수록, 여러분은 그분의 영향을 더 잘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으로 돌아서서 여러분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여러분은 그분에게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434)


<금주간 성서읽기> 갈라 4-6장 / 필리 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VIII. 그러면 우리가 왜 이 세상의 많은 것들에 마음을 쏟으면서 본질적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대로 기도하지 않고 다르게 할까 봐 걱정되어 묻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음의 시편에서 말하는 대로 기도하면 복잡하지 않고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시편 27,4).
그곳에서는 밤낮이 오고 가면서 날이 바뀌는 일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한없이 동시에 존재하고, 삶도 끝없이 연속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영원한 삶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 가르치십니다. 참된 생명이신 하느님께 많은 말로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오히려 우리의 입놀림을 조심할수록 그분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우리가 기도를 드리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요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마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한편으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루카 18,1-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