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오늘 주님 말씀 중에서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라는 말씀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요즘 제가 친구 덕을 보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친구란 이런 것이구나 또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올해 저희는 장학기금 마련을 위하여
바자회 대신 음악회를 계획했고 시니어 성가대를 만들었는데
남성 대원들의 수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들에게 응급으로 지원을 요청했는데
친구들은 친구라는 것만으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동참해줬습니다.
친구는 많지만 진짜 친구는 많지 않다고 하고,
진짜 친구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이라고 하는데
제 친구들이야말로 이런 면에서 진짜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그저께 다른 분들도 동참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원래 같이하려다가 다른 합창대와 시간이 겹쳐 같이하지 못하겠다던 분들인데
그저께 식당에 농작물을 가지고 오셨을 때 음악회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니
그런 좋은 일이라면 기존의 합창대에 양해를 구하고 함께하기로 한 겁니다.
이 또한 오늘 주님 말씀처럼 진정한 친구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라고 하시며 이런 종과 달리
친구는 친구가 하는 일을 알고 또 같은 일을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친구라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하고,
같은 일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실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고,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복습 삼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의하면 살리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물론 사랑이지만
사랑 가운데서도 살리시는 사랑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사랑 가운데는 죽이는 사랑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 이런 사랑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있습니다.
애욕 곧 사랑하고픈 욕망 또는 욕심의 사랑이나
스토커(Stalker)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사랑은 욕심이기에 원하는 사랑을 소유할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여버리거나 파괴하는 사랑으로 돌변하게 되지요.
그런데 사랑의 욕심도 있지만 욕심의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이지만 사랑에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겁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런 사랑이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물리적으로 죽이거나 파괴하진 않지만
사람의 기를 죽이거나 꺾는 경우는 흔합니다.
교만의 사랑 곧 교만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는 사랑도 있습니다.
친구 같은 아빠가 아니라 군림하는 아버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랑을 베풀었으면 그 사랑에 고마워하며 원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거나 되지 않으면 분노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하지요.
그래서 이런 사랑도 살리는 사랑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지요.
그러므로 살리는 사랑은 이런 사랑들이 아니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당신이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다른 복음에서 당신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사랑을 배워서 알고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사랑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