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뉘우치는 베드로 사도(1600~1605)
작가 : 엘 그레코
규격 : 켐퍼스 유채 93.7 x 75.2cm
소재지 :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온 인류의 애도 속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후 교회는 공백상태로 있다가 곧 추기경단에 의해 새 교황님이 레오 14세의 이름으로 선출되어 교회를 기쁘게 했다.
이제 우리 교회는 그동안의 여러 축쳑된 경험에 의해 탄탄한 기반이 구축되어 있기에 누가 교황이 되어도 그리 세상에 염려를 끼칠 만한 처지는 아니나 아무튼 반가운 일이다. 더욱이 새 교황님의 그동안 행적이 오늘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처지가 되어 새 교황님의 탄생은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모인 신자들 만이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축제의 소식이 되고 있다.
우리는 교황직의 근거를 성서의 다음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선교 여정 중 당신이 지상 사명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에 가시기 전 교회를 이끌 제자단의 책임자로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그에게 천국 열쇄를 주시면서 교회의 전권을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신임을 받은 베드로였으나 그후 곧 이어지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체포되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기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배반을 세 번이나 하게 되는데 성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작가는 바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마음 아파하는 베드로의 이 모습을 여섯 개의 작품으로 남겼는데, 이 작품은 그중 하나이며 신앙이기 이전 인간적으로 중요한 가치인 인간적 신의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순교자들의 공경 안에 이것이 포함되고 있으나 우리 교회가 강조하는 순교나 배교라는 것이 너무 종교라는 틀에 좁게 해석됨으로서 실재 삶안에서 인간적 신의의 가치는 소홀히 처리되는 안타까운 처지에서 이 작가는 베드로의 후회를 통해 인간 삶의 신의의 고귀함을 알리고 있다.
실재적으로 종교인이라고 해서, 열심하다는 신자라고 해서, 인간적 신의 표현에 있어 비종교인 보다 더 나은 점이 없는 현실에서 작가는 베드로의 배반이라는 성서적 사건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중요 요소인 인간적 신의를 지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베드로가 인생의 말년인 듯 흰 수염이 성성한 용모에 슬픈 모습으로 앞을 관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보는게 아니라 젊은 시절 주님의 큰 신뢰를 배반한 것을 뉘우치는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 과거는 그냥 지나간게 아니라 지금 자기 삶으로 지켜야 할 중요한 주제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과거의 어둠을 회상하는게 아니라 깊은 두손을 모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즉,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단순한 과거 실수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참회를 동반한 신앙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마치 다윗 왕이 베사파와의 범했던 그의 불륜이 드러났을 때 조건없이 하느님 앞에 뉘우치며 바친 기도와 같은 것이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시편 51,1)
그의 손 아래에는 굵직한 열쇠 두 개가 있는데, 이것은 생전에 주님께서 그를 제자단의 으뜸으로 임명하시면서 주신 교회 공동체를 바르게 인도할 모든 권한의 상징인데 그는 이런 자기를 조건없이 믿어준 스승의 기대를 저버린 배신자의 처절한 모습이 되어있다.
베드로 사도의 윗 부분에는 밤의 희미한 분위기에서 보이는 두 개의 꽃나무 같은 형상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체포될 당시 올리브 동산의 모습이며 밤을 비추는 화사한 것이나 날이 새고 해가 뜨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인간 삶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허상의 상징이다.
베드로에 있어서도 주님을 배반치 않고 항구히 따르다 체포되어 고통을 당하거나 아니면 순교하는 것이 자기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인데, 그는 신변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스승을 배반한 죄는 현세의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영원한 상급을 놓치는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이 부분은 제시하고 있다.
노란옷의 베드로 곁에 밝은 흰색의 수호천사가 있고 그 아래 암청색의 여인이 있는데, 이 천사는 성 베드로를 지키는 수호 천사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사랑의 표시로 인간이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에도 그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수호 천사를 보호자로 주셨음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천사는 바로 성 베드로와 성녀 막달래나를 지키던 수호 천사의 상징이다.
성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신뢰를 받아 교회의 의뜸으로 인정받은 처지였으나 그의 믿음이 약했기에 자기 앞에 닥치는 위험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을 배신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성녀 막달래나는 심성이 약한 여성이었으나 그의 든든한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했기에 부활의 소식을 증언할 만큼 용감했으며 이 용기가 베드로 사도와 반대되는 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복음 16장 부활 사화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막달레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님 부활 소식을 전했으나 그들은 막달래나의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연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래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마르 16,9-11)
이것은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대할 수 있는 현실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여러 경험이 많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어려운 순간이 되면 갈팡질팡 하며 책임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경우가 있는 반면 순박한 신자들이 하느님 뜻으로 의심없이 받아 들여 좋은 결실을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스승을 배반한 후 유다스처럼 절망하지 않고 이것을 깊히 뉘우침으로 이 실수가 교회의 으뜸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경륜을 쌓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이 창설하신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신 내용이 성서에 감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내용은 바로 주님을 향한 변한 없는 사랑이 있을 때 어떤 시련의 순간에도 이길 수 있고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주님의 권고이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6-18)
요 몇 주간 세계는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서거와 레오 14세 새 교황님의 선출로 감동과 가쁨이 교차하는 시간에 있다. 너무도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은 많은 선의의 인류에게 큰 존경의 관심과 슬픔을 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임자가 너무 휼륭하면 후임자의 처신과 위상이 좀 힘들어진다는 인간 집단의 관례와 달리 레오 14세 교황님을 선출함으로서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염려를 거두고 기쁨으로 좋은 교황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근대 교황님들은 삶의 방법이나 사목 방향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성인의 면모를 보이셨다. 교황님이 표시하신 성덕은 프란치스코 교황님 부터 더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배려 뿐 아니라 그분의 삶 자체가 인간들의 소박한 삶에 동참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보이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황이라고 하면 너무 신비적이며 초월적인 모습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렇게 할 때 교황직은 우리 교회 지도자 수준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있고 그분이 보이신 인간적 면모가 많은 선의의 사람들에게 교황을 현대의 어려운 문제가 산적된 세상을 바라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의 면모로 바꿔 놓았다.
이 작품에서 베드로 사도가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인간적 신앙적 약함 때문에 스승인 주님을 잠시 배반했다는 인간적 후회와 슬픔의 표시이기에 근세 교황님들이 보여 주신 여러 인간적 면모 안에서 약한 부분이긴 해도 인간적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교황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간적 여러 약점을 지닌채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신앙의 정직한 면을 표현하고 있다는 면에서 큰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