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수호천사란 어떤 존재인가?
오늘 독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존재,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느님 나라, 천국으로 안내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 중에는 이런 역할을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부탁하여 이런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부탁이 없어도 그의 사랑으로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축일로 기념하는 수호천사란
이런 수많은 사람들을 통칭하고 포함하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가 없지 않으니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이런 수호천사들의 도움도 잘 받고 우리도 수호천사가 되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수호천사는 이런 수호천사가 아닌
하느님께서 보낸 수호천사, 역시 영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라고 얘기하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분심잡념일지도 모를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수호천사를 나에게 보내주신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미 있는 천사들 중에서 하나를 짝지어 주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전담하는 수호천사를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같이 창조하시고 그래서 나와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라는 것인지.
아니, 더 근본적으로 나를 전담하는 수호천사가 정말 있는 것인지.
왜 이런 의문이 들었냐 하면 하느님께서 수호천사를 보내주셨다면
더욱이 사람 모두에게 각각 전담하는 수호천사가 있다면
어찌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잘 가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수호천사는 훌륭한 가이드이고
다른 사람의 수호천사는 미숙한 가이드란 말인가?
저는 자매님들한테서 여러 번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남편은 길을 몰라도 잘 묻지 않는다고.
묻는 것이 그리도 자존심 상하는 것인지,
남에게 도움 청하는 것이 그리도 싫은지,
모르면 물어가라 해도 묻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길을 잃거나 시간을 지체해 고생을 사서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저도 남자라고 잘 묻지 않습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있는데도 어떤 때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내 생각대로 길을 가곤 합니다.
이런 저를 생각해보니 수호천사가 우리를 잘못 인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수호천사의 인도를 무시해서 천국길을 잘못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 길을 잘못 가는 데는
사실 수호천사의 인도를 무시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전담 가이드로서의 수호천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학이 있고 부정하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사실 오늘날 수호천사의 존재를 얘기하는 것은
달나라를 간 현대에 옥토끼를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구닥다리입니다.
그러니 진정 구닥다리라면 이제 버려야 하고,
낭설이거나 신화일 뿐이라면 탈신화화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가 수호천사에 대한 신심을 가르치고 있음은
길 잃은 우리를 당신께 데려오도록 사랑하는 아드님마저 보내신 하느님께서
영적인 존재를 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인 이 영적 존재를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