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성서에서는 아이 못 낳는 여자를 그리 치켜세우는가?
“환성을 올려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즐거워하여라. 산고를 겪어보지 못한 여인아!”
아이 못 낳는 여자가 당시 사회에서 제일 천대 받는 사람 중 하나이기에
미천하고 비천한 사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차원에서 치켜세우는 것인가?
사랑과 정의 차원에서 그런 측면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그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름 하여 <불임영성>이라고 할까요?
그냥 정의 차원에서 기를 살려주는 것은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이지만
<불임영성> 차원에서 불임여성을 치켜세우는 것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임영성>이란 어떤 것입니까?
불임이란 하느님을 잉태하기 위한 것이고
하느님을 잉태하기 위해 인간의 자녀를 낳지 않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얘기한 적이 있지만
자기 자녀를 가진 사람은 하느님을 낳으려고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칠 전 강론에서 제가 얘기한 것 생각이 나시나요?
죽어 다시 태어나 엄마가 된다면 지금의 아들의 엄마가 되길 원하는지,
아니면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길 원하는지 물었을 때
결혼을 안 한 분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길 원했지만
아들을 둔 분들은 지금의 아들의 엄마가 다시 되고 싶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왜 광야에 가서 살았을까?
세례자 요한은 왜 또 광야에서 회개를 외쳤을까?
도시에 사람들이 많은데 왜 도시로 가 회개를 외치면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제 생각에 광야의 의미는 <불임영성>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물으시지요.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에는 실로 아무 것도 없고
그래서 구경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야말로 갈대 정도이고 황량함이 볼 거라면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봅니다.
이것저것 구경하지 않고 하느님을 관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많이 보는 광경은 이런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가족여행을 가면서도 차안에서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느라 풍경을 보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니 어른들도 많이 전철을 타면
스마트 폰을 보느라 다른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어제도 지방에 갔다가 오늘 길에 전철을 탔는데
그 많은 사람이 하나같이 스마트 폰을 보고 있고
젊은이들은 대부분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나면 게임이나 하고 있으면 사고력을 어떻게 키울까?
사고하는 것도 하나의 힘이기에 사고력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게임이나 즐기면 언제 사고하는 힘이 생길까 걱정이 됐지요.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봅니다.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