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곧 협력자들의 믿음 때문에
병자의 죄가 용서받고 병이 치유되어 전 존재적으로 구원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그러니까 이스라엘 전역에서 모연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인데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시골구석까지 몰려왔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아니면 병의 치유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이어지는 뒤의 얘기를 보면 그런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고
적어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보러온 것입니다.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말에 간을 본다는 말이 있지요.
음식을 식탁에 정식으로 올리기 전에 음식이 짠지 싱거운지,
맛은 어떤지 미리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은 예수님의 간을 보기 위해 온 겁니다.
이에 비해 중풍병자와 협력자들은 병의 치유를 위해 왔다가
구원까지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구원의 공동체이고
구원을 위해 공동체로 나아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구원의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저는 요즘 저희 수도공동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 편으로는 안타깝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간절합니다.
세상이 개인주의화되다 못해 이기주의적 개인주의화하고
그래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느라, 곧 각기 살길 찾느라 힘겹게 사는데
이런 것이 수도생활 안으로도 들어와 구원이 개인화하고
구원이 개인화함으로써 공동체로 구원되는 체험이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개인마저도 구원체험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이 이러니 세상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니 수도원이 여러분이 사는 세상만도 못한가요?
그렇다면 수도원은 안 됐지만 세상은 그나마 다행이지요.
아무튼 이런 우리에게 중풍병자와 협력자들은 훌륭한 모범입니다.
이들에게 중풍병자의 고통은 개인의 고통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들은
지붕을 뚫기까지 하며 중풍병자와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믿음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 협력자들의 믿음까지 보시고 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에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의 이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고 지당한 말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들이 모르는 게 있고 이것을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면서도 한 분이 아니시라는 점 말입니다.
삼위일체이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 될 때 하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같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그들은 치유를 받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고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따로 생각하는 것이 비구원입니다.
하느님과 나를 따로 생각하는 것이 비구원이고,
너와 나를 따로 생각하는 것이 비구원이며
나만 구원 받겠다는 것이 비구원임을
우리는 오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