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과 백인대장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주님과의 관계가 이러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하는 루카복음과 비교되는데
이로써 마태오복음은 백인대장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냅니다.
그렇지요. 보통의 경우는 루카복음에서처럼 정복국의 백인대장이라면
직접 오기보다는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데 마태오복음에서는
자기 종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기까지 사랑을 합니다.
저도 사랑을 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저를 낮추거나 그를 존경하는 사랑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겸손한 사랑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어야 완전한 사랑이고,
겸손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게다가 백인대장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스승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주인이요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이기도 하지만 구원자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기에 한 말씀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한 말씀으로 치유하실 수 있다는 이 이방인의 믿음은
말씀의 창조주께 대한 창세기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1장의 창조는 2장의 창조와 비교가 됩니다.
2장에서 하느님은 땅으로 내려오시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숨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생명을 창조하시는데 비해
1장에서 하느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그저 한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생기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생기는 것이 생명이요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복되도다.’라고
한 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라.’고 고백할 때 이 백부장처럼 우리가 믿는다면
몸과 영혼의 치유가 참으로 이루어지리라 저도 믿고 여러분도 믿어야겠지요.
그런데 백부장의 이런 겸손하면서도 대단한 믿음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도 상응하는 칭찬과 사랑을 보이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고 하십니다.
백부장의 고백대로 가시지 않고 한 말씀으로 원격치료하실 수 있지만
굳이 가셔서 당신의 손을 백부장의 종에게 얹어 치유해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사랑이요,
따듯한 내재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지 않고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 말씀으로 무에서 창조하신 분이 한 말씀으로 구원하실 수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구원키를 원치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입니다.
전화 한 통화, 편지 한 통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자식의 손을 잡아주고 밥 한 끼 먹이고픈 것이 부모의 사랑이듯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이런 내재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대림절은 이렇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고,
이렇게 오셔서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