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마을에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들어가십니다.
헌데 맞은편에서 외아들이 죽은 과부가 마을 사람과 무리를 지어 갑니다.
그래서 두 무리가 조우하게 되고 외아들과 과부를 중심으로 둘러섭니다.
조우遭遇.
제가 조우라는 표현을 썼는데
조우는 우연히 마주치거나 만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우와 분명히 다릅니다.
소녀의 경우는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께 자기 집에 오셔서
딸을 살려달라고 청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살려주신 경우인데 비해
오늘은 과부도 청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죽음 자체를 모르고 계셨지요.
여기서 드는 생각은 과부는 예수님과 조우한 덕분에 아들을 살렸지만
만일 조우하지 못했으면 아들은 끝내 죽었을 거고 구원은 없었겠지요.
그래서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습니다.
구원은 이렇듯 우연한 것이고 운 좋은 사람에게나 주어지고
그렇지 않는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예민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지요.
엘리야 시대에 과부가 많이 있었지만 사렙다 과부에게만 파견되고
엘리사 시대에 나환자가 많았지만 나아만만 치유되었다고 말씀하시어
고향 사람들의 분노를 사신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들만 구원되었다는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몇 사람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지
몇 사람만 구원코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몇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들만 구원코자 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구원코자 하시는 분이시며
또 몇 사람의 병을 고쳐주셔도 구원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의 치유를 받아 구원까지 받은 사람도 있고,
병만 치유 받고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얘깁니다.
복음에 바로 그런 예가 있지 않습니까?
나병환자 열 사람이 같이 치유를 받았는데
감사를 표하러 돌아온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 뿐 아니었습니까?
병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병의 치유는 말 그대로 병의 치유일 뿐이지 그게 곧 구원은 아닙니다.
병만 치유 받고 입 싹 닦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수두룩하고,
매일같이 은총을 수없이 받고 입 싹 닦는 사람 우리 가운데 수두룩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여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한 사람이 많아도
그 행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사람에겐 구원이 발생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저 인간적인 체험,
다시 말해서 극한체험이나 성공체험을 한 것일 뿐이지요.
아무튼 하느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한 사람의 병을 치유해주셔도 그 사람만 구원되기를 바라시지 않고
그 한 사람을 통해 모두가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지만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오시지 않고
모두에게 오셨다고 고백하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