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을 바꾸심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특히 세 제자를 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부로 제자들에게 변화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 특별히 보여주신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겟세마니의 그 처참한 모습도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셨고,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것도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떤 것을 봤을까요?
영광스러운 모습을 봤을까요, 아니면 처참한 모습만 봤을까요?
능력의 주님만 봤을까요, 아니면 무력하게 죽으시는 주님만 봤을까요?
제 생각에 제자들의 인생을 통틀어 볼 때
예루살렘 입성 전에는 영광스런 모습만 보고,
수난 다음에는 처참한 모습만 봤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순조롭고 평화로운 때는 수난의 예수님과 십자가는 보고 싶지 않고,
큰 환난과 고통 중에는 영광스런 주님, 부활의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덕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덕으로 본다?!
예. 덕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사랑으로 수난의 주님과 십자가를 보고
환난과 고통으로 암울할 때는 믿음과 희망으로 부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너무도 황홀하여
타볼 산 위에 초막을 셋을 짓고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다.”는 유행가 가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초를 치듯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그것을 대비하고, 그것을 직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돌아가시는 주님을 사랑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잃고 절망과 두려움으로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이 함께 계시니
두려워 말고 당신이 주는 평화를 받아 지니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아무리 암울하고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바로 그 때 사랑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부활하시고 부활케 하시는 주님을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나이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십자가는 걸림돌입니까?
아니면 사랑입니까?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