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은 당연한 듯 들리지만
깐깐하게 따지면 이상한 말일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구해달라고 하면서 여인은
자기의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딸에게 베푼 자비는 어미에게 베푼 자비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딸에게 베푼 자비가 어미에게 베푼 자비가 되는 것은
딸과 어미는 갈리거나 나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런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임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일체화의 사랑과 개별화의 사랑이 있는데
아비의 사랑이 비교적 개별화의 사랑이 강하다면
어미의 사랑은 일체화의 사랑이 너무도 강하지요.
그리고 그래서 자녀를 망치게도 합니다.
자녀가 나이를 먹으면 이제 독립적인 자아로 성숙해야 하고,
부모를 떠나 홀로 설 수 있게 해야지 그것이 바른 사랑인데
어떤 어미들은 일체화의 사랑이 너무 강해
어미와 자식 간에 서로 불리불안증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미성숙한 일체화의 사랑이고 부정적인 측면이라면
성숙하고 긍정적인 일체화의 사랑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집착으로 인한 불리불안증의 일체화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일체화의 사랑을 볼 수 있는데
여인에게는 딸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이고,
딸의 구원이 자신의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으로 같이 나가는 이런 일체화의 사랑을 꿈꾸고 있는데
지난 포르치운쿨라 행진에서 그런 가능성이랄까 싹을 보았습니다.
제가 행진을 하면서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쉽고 가까운 길은 혼자 가는 것이 편하고 혼자서도 갈 수 있지만
어렵고 힘든 길은 혼자 갈 수 없음은 물론 엄두도 내지 못하기에
반드시 같이 그리고 함께 가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행진자들은 인간적으로 고통을 혼자 마주하고 헉헉대다가도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같이 가는 것임을 상기하였으며,
지치고 다쳐서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체가 힘들어도
그분들을 떼어놓고 가자고 하지 않고
오히려 무너지고 떨어지려고 할 때 서로 부축하고 끌어주었습니다.
이번 행진 중에 저는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막바지에 다다라 체력이 정말로 고갈되었을 때
기차놀이처럼 지팡이 두 개로 둘을 역었습니다.
체력이 다한 자매님이 뒤에 서고 힘이 조금 더 남은 제가 앞에서 끌었고,
다른 여러분들도 그렇게 짝을 만들게 하여 걷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힘이 빠진 다리에 힘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무너지는 마음을 일으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82세가 되신 어르신부터 수술한지 얼마 안 된 자매님까지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도
구원의 길이고, 사랑의 길이지만 결코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고, 그래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일체화를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