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오늘 복음의 장소는 어디인지 명확치 않습니다.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은 가파르나움 또는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이라고
오늘 사건의 장소를 명시하는데 루카복음에서는 그저 어느 고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어 어느 고을에 들어가신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고을의 사람들을 찾아가시자
사람들이 주님께 찾아오는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일반 군중과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풍병자와 도우미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모두 만나지만 만나고 난 다음의 결과가 다 다릅니다.
당연한 것이 찾아온 자세와 이유가 다 달랐기 때문이지요.
우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무엇을 얻고자 온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보고자 왔기에
아무런 감동도 구원도 발생치 않고 의심만 안고 돌아갑니다.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주님한테서”라고
시편 저자는 노래하지만 아무리 구원자가 찾아와도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이라야 믿고 믿는 사람이라야 구원받기 때문이지요.
그렇지요. 구원자에 대한 믿음은 강한 바람에서 생겨납니다.
처한 처지가 너무 곤궁하고 그래서 어떤 바람이 간절할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가 그랬을 겁입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꼼짝할 수 없고 대소변도 남에게 의지해야 하니.
그러기에 그가 그 절실함 때문에 주님을 찾아간 것은 수긍이 되고,
주님께 다가가기 힘드니 지붕을 뜯기까지 한 것도 이해가 가지만
그를 들것에 태워간 구원의 협력자들의 행위는 놀랍기만 합니다.
남의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기 일처럼 할 수 있었을까?
중풍병자의 강요에 어쩔 수 없어서? 아니면 돈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주님의 말씀을 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같은 믿음, 공동의 믿음을 가진 겁니다.
중풍병자와 같은 믿음을 가졌고 모두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믿음이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해야 하고
이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야말로 최고의 공동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믿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도 훌륭한 믿음이고 훌륭한 사랑이지요.
허나 이런 믿음과 사랑은 매우 인간적인 믿음이고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서로를 믿고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 대한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같이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들 중에 소위 외짝 교우라는 분들이 많은데
이분들의 말을 들으면 서로 신뢰하고 사랑을 하면서도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주 아쉬워합니다.
이것은 단지 성당에 같이 손잡고 가지 못하는 아쉬움만이 아닙니다.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존경은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요,
너의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가지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짙은 아쉬움인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들처럼
주님께 대한 같은 믿음과 같은 사랑을 지님으로서
서로의 구원에 도움을 주는 구원의 동역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