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셨다.”(마태 9,35)
대림절이라 하면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심이 첫 번째는 하늘에서 이 땅에로 내려오심이지만
두 번째는 우리에게로 다가오심이요, 우리를 찾아오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모든 마을을 찾아다니심에 대해 얘기하는데
우리를 찾아오심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보다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주님께서 바로 나에게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이기 때문이고
나라는 존재가 바로 “병자요 허약한 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마태오 10,6)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도시 한복판에 큰 병원을 차리시고
병자와 허약한 자들이 그리로 찾아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병약한 우리를 가정방문하시듯 찾아오시는 분이시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은 진정 명의이실 뿐 아니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능력의 주님일 뿐 아니라 사랑의 주님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옛날 우리가 아플 떼 우리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비록 명의는 아니지만 내 머리에 따듯한 손을 얹어주시고
당신 손은 약손이라 하시며 내 배를 쓰다듬으시듯 그런 사랑의 치유자시죠.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병약한 우리,
그래서 찾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보다도
길 잃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에서 더 크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태오복음은 루카복음과 달리
<잃은 양>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라고 하는데
백 마리 양의 비유를 보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으면......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12)
그러니까 공동체가 양 한 마리를 잃었다고 보는 루카복음과 달리
마태오복음은 분명히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수로 길을 잃었을 수도 있지만 'My Way'를 고집하며
같이 가는 길에서 제 멋대로 이탈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도
공동체가 잘못하여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실수건 고의건 개인이 길에서 벗어난 양이고 그래서 괘씸한 양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이리로 오라, 저리로 가라고 똑같이 얘기하는데
못 따라오거나 안 따라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지라도 그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나서는 주님이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시는 주님이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느 관구 봉사자 형제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그가 그대의 눈앞에서 수천 번 죄를 짓더라도
그를 주님께 이끌기 위하여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이런 형제들에게 늘 자비를 베푸십시오.”
오늘 이사야서는 자비를 베푸실 주님께 대해 얘기하고
오늘 복음은 여러 형태의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 대해 얘기하는데
길 잃은 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병약자를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구해주는 것보다도
더 큰 자비행이 아닐까 묵상하게 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