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복음 선포를 엄청나게 한 분입니다.
그랬기에 자신의 복음 선포의 역정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이렇게 자랑한 적이 있지요.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 세 번, 돌질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2코린 11, 24-7)
그렇지만 이렇게 자기의 복음 선포를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오늘 얘기하고 있으며 그 이유를 댑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그러니까 복음 선포를 자랑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무이기는 하나 행복한 사람의 의무입니다.
행복하다면,
정말로 행복하다면
복음 선포를 해야만 합니다.
행복의 최정상에 오르지 않은 저도 행복하지 않거나
불행한 사람을 보면 저만 행복한 것이 무척 미안하고
그래서 행복의 비결을 어떻게든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면 복음 선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는 더더욱 복음 선포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뒤집어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거나
적어도 복음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하비에르 성인도 그런 분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여행한 거리가 엄청납니다.
비행기와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인도 선교를 시작하여 말레이 반도, 뉴기니를 거쳐
일본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중국까지 가려다가 선종합니다.
그러기에 그가 한 다음 말은 크나큰 메아리가 됩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하비에르 성인은 바오로 사도처럼 학식이 뛰어난 분이었지만
지식보다 사랑, 특히 복음 선포의 열정이 더 큰 분이었습니다.
그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었지만
공부만 하고 선교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럽의 여러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외치며
그들의 게으름을 꾸짖을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비에르 성인의 꾸짖음이 우리에게 화살처럼 꽂히는 날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우리를, 아니 저를 꾸짖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신앙인처럼 복음 선포의 열정이 없는 게으른 신앙인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