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 13,8)
다른 빚은 지지 말아야 하지만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사랑의 빚은 적극적으로 지라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랑의 빚은 지지 않을 수 없으니 져도 된다는 뜻인가요?
우선의 사랑의 빚이란 무엇인지부터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이것을 옛날 번역과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옛 번역은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라고 한 다음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사실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는 옛 번역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요.
다른 의무는 법에 정해진 대로만 하면 그 한계가 있지만
사랑이라는 의무는 해도 해도 그 끝이 없는 것이며, 하지만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최소한의 사랑인 법보다는 큰 사랑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의무는 아무리 했어도 다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빚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법의 요구에 의해서 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더 하려는 것이니 의무를 다 한 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어지는 율법조항들이 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요구사항이 되고 강제조항이 되겠습니까?
가장 진실한 사랑을 하려는 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말이,
어떠한 생명이라도 존중하는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에게 탐하지 말라는 말과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에 틀림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좀 다른 관점에서도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의 의무가 있는 사람일뿐 아니라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요, 빚을 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관점 말입니다.
우선 우리는 다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부모에게 빚을 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 빚진 것 없는 것 같은 사람에게도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맹수와 강도가 출몰하는 아주 위험한 길을 밤에 원수와 함께 갑니다.
이때 같이 갈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나에게 사랑인데,
그 원수가 등불도 들고 있다면 그가 비록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비추는 거라 해도 나는 원수에게 사랑의 빚을 진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랑의 빚을 서로서로 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빚을 져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사랑의 빚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려고 하시자
베드로 사도가 발만은 안 된다고 거절하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는 거라고 하시며
제자들도 당신처럼 하라고 본을 주시는 거라고 하셨지요.
개인주의가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요즘, 꽤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부담이고, 사랑보다 부담이 싫으며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이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것이 편하고 자유롭다고 하는 외로운 영혼들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빚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