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9)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하느님의 법>을 살고자 하는 <이성의 법>이 있는가 하면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하는 <다른 법>도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늘 두 개의 “나”가 있고,
어떤 때는 더 많은 “나”가 있어서 다중의 “나”가 복잡하게 갈등합니다.
이렇게 하고픈 나와 그렇게 하기 싫은 내가 있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나와 그렇게 할 수 없는 내가 있으며,
의식적 의지의 나와 무의식적 의지의 내가 있고,
새로움을 위해 자신을 바꾸려는 나와 익숙한 것에 길들여진 내가 있으며,
새로움에 도전하려는 나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려는 내가 있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려는 나와 지금 있는 곳에 안주하려는 내가 있으며,
새로운 추동推動의 나와 관성적인 내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에 대해 대단히 한탄을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로마7,24)
그러나 저는 두 개의 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절망할 필요도 없고 조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벗어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노력을 하면 되고,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 받으면 됩니다.
우선은 구원자 주님께서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져야 하고,
그런 믿음과 희망 안에서 내가 해야 할 노력을 하면 됩니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s oneself.”
하늘은 스스로 하(돕)는 자를 돕는다는 뜻이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지요.
인간이 할 바를 다하고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나를 바꾸려는 노력하되
그러나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해야겠다고 의지를 가지고 의식을 하며 노력하더라도
우리의 길들여진 몸,
우리의 오래된 습관,
우리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은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만큼
바뀌는데도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은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한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다른 데서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드러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12,7-9)
그러므로 우리도 원하지 않는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 것입니다.
그 원하지 않는 나를 떼 내려고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 것이고
빨리 떼어 내지 못한다고 자학하지도 말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것을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쌍둥이처럼 항상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 나를 떼어 내려고 또 바꾸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안 되면
어쩌면 교만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주신 은총일지도 모르니,
그리고 그것도 어쨌든 나이니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