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작은 것이 커지는 것과 같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주 작은 개척교회로 시작하여 대형 교회가 된 것이
바로 이 <겨자씨의 하느님 나라>의 의미이겠습니까?
어떤 대형 교회는 바로 이 의미의 교회일 것이고,
어떤 대형 교회는 이 의미와 정반대일 것입니다.
제가 그 이름을 명시적으로 거명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아주 유명하고 큰 교회 중의 하나는
창설자가 살아있을 때는 복음의 작음을 잘 살아
하느님께서 그 교회를 키워주셨지만
그 후임자가 교회를 사목하면서부터는 작음은 사라지고
거대주의를 추구하는 다른 대형 교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 겁니다.
작은 것이 이렇게 커진 것이 바로 하느님의 교회라는 표시라고,
더 나아가 이렇게 교회가 크다는 것이 바로 하느님 축복이고
하느님께서 이 교회와 함께 계시는 표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큰 것을 지향하는 작음은 하느님 나라답지 않다고 말입니다.
제가 가끔 이런 것을 봅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주님 말씀하셨지만 모든 가난이 하느님 나라의 가난은 아닙니다.
욕심 가득한 가난이 얼마든지 있지요.
가난이 너무도 싫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유지고 싶고
가난만큼이나 욕심이 많은 가난이 바로 이런 가난입니다.
이런 가난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가난이 아닙니다.
이런 가난은 무능한 가난이든지 욕심스런 가난일 뿐입니다.
작음도 진정 하느님 나라의 작음이 아닌 작음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작게 시작하지만 나중에 커지리라는
욕심이 씨앗처럼 배태된 작음이 바로 이런 작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작음,
복음적인 작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큰 것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하며,
작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작은 그런 작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말년에 한 가지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수도회가 점점 커지는 것과
커짐에 따라 작음의 이상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지요.
프란치스코도 회개하기 전에는 출세와 성공을 꿈꾸던 젊은이였고,
그가 전쟁에 참여했거나 다시 참여하려던 것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이런 그를 나환자를 통해 회개생활을 시작하게 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살아야 할 생활양식을 깨닫게 하시자
그는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작은 형제회>를 창설합니다.
그런데 고위 성직자들이나 똑똑한 사람들도 들어오고 수도회가 커지면서
교회 안팎의 영향력도 커졌지만 그만큼 이상도 잃어가고 있었지요.
그래서 자신이 죽고 난 뒤 수도회의 미래에 대해 큰 걱정을 한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이 수도회가 누가 세운 수도회냐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이런 걱정마저 내려놓기는 하였지만 작은 형제회는 참으로 작지 못하였고
그때마다 개혁운동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커지도록 저와 저희 수도공동체는 작아져야 하는데
속물처럼 큰 것을 욕심내는 겨자씨는 아닌지 두려워하며 돌아봅니다
우리가 흔히 가난하면, 물질적인 가난을 떠올리지 않나 싶습니다. 근데 물질을 움직이게하는 것은 마음, 정신, 영혼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곡간의 열쇄는 마음에 있다고 하듯이...
"복음적인 작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큰것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하며 작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작은 그런 작음입니다.""
라는 말씀 처럼....
초심을 잃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사는 삶의 모습이 진정한 가난이 아닐까 싶고 그런 모습을 바라 볼 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회개하게 된다 싶습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말 다시 한번 떠올리며...
"큰것을 욕심내는 겨자씨는 아닌지.."
돌아보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