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은 받아도 구원은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병을 고쳐줬는데 병만 치유 받지 사랑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유가 사랑이고, 사랑이 구원인데 사랑도 구원도 발생하지 않고,
하느님도 발생치 않은 것이 오늘 아홉 나환자의 불행이고,
우리도 이 아홉과 같다면 같은 뜻에서 불행합니다.
우선 치유만 받고 사랑은 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치유만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치유를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의무이지 사랑이 아니지요.
같은 식으로 어머니의 밥이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밥을 지어 자식에게 먹이는데
자식은 그것을 부엌데기 엄마의 당연한 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발생치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받아도 구원이 발생치 않고
하느님이 발생치 않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 경우는 믿음이 없고,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
엄마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이고,
친구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을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는 친구의 사랑에서 친구와 친구의 사랑만 봅니다.
연인끼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풋사랑일 경우,
다시 말해서 사랑이 초보일 경우 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볼뿐 같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볼뿐 하느님 안에서 상대를 보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 형제를 영적동반하면서 이성문제를 안고 있는 형제를 만납니다.
그때 저는 그 자매와의 사랑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보다는 그 자매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 자매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그럴 때 자매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고 현재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저의 충고대로 할 경우
자매와의 사랑은 하느님과의 사랑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심지어 이웃과의 사랑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때까지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메마른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깨닫게 하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촉촉한 사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들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들인 이웃 사랑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참으로 자기 체험없이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은 체험되는 것이기에.
가톨릭 신앙을 체험신앙이라 말하고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이시다고 말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듯이
사랑이라고 다 사랑일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만......
모든 인간 문제의 밑바닥에는 사랑받지 못한 애정결핍이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허해서 품을 기대하나 품어 줄 사람이 없고
품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에게 품이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의 그 품으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촉촉한 사랑을 하게"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들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들인 이웃 사랑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