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드리는 말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 4,20) 정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고, 오늘 복음의 배경인 파스카 축제도 그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공간이라는 의미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성당의 감실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 가운데 머물로 계심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성체가 감실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성당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공간, 즉 성전이라면, 성체를 직접 입으로 모시는 우리의 몸 또한 성전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오늘 제2독서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치를 언제나 항상 느끼지는 못합니다.
기도하려고 자리에 앉아 초를 켜놓고, 성경을 펴 놓지만,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잠깐을 앉아있지 못하고 다시 이런 걱정, 저런 걱정에 몸이 뜰썩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이렇게 시간을 보내느니, 다른 할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결국에는 몇 분 앉아있지 못하고 일어납니다.
시끄러운 마음들, 물론 삶에 필요한 부분들이고,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들이지만, 기도에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는 많은 사람들, 성전에 있는 상인들, 환전상들, 모두 성전에서의 전례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물로 봉헌할 동물들을 사기 위해서, 성전 세금으로 낼 돈을 바꾸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로만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적인 목표에만 집중해서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공간이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한 때 우리의 마음은 시장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내 안에서 도통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하느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건드리면 곧 폭발할 것처럼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마음 안이 화로 가득 차 있거나, 미움으로 가득할 때, 우리 마음의 성전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성당에 가도 하느님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위한, 건물로서의 성당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내 몸과 내 마음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당을 가꾸는 것처럼, 내 몸과 마음 역시 가꾸어야 합니다. 미움보다는 사랑으로, 화보다는 인내로서 자신을 대하고, 조금은 여유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위해서 앉아있는 것이, 때로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의무적으로 느껴지기에 조금은 힘들고, 조금은 지루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첫 걸음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시끄러운 세상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세상은 더 이상 마냥 시끄럽기만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거룩한 만큼,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 또한 거룩합니다. 그 거룩함을 잘 이어갈 수 있는 나날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