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씨를 뿌리는 방식은 우리와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씨를 뿌린다면,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겠지만, 오늘 복음의 그는 땅의 좋음을 판단하고 그것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즉 우리가 좋은 땅에 씨를 뿌리려 한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한 노력, 즉 우리의 노력에 비해 더 많은 수확을 얻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씨를 뿌리는 사람이 땅의 좋음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수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씨를 뿌린다는 것은, 가을의 추수를 기대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가라지의 비유'는 추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추수에 집중되어 있기 보다는, 봄에 씨를 뿌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뒷부분에 보면,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의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의 상태를 염려에 두지 않고 씨를 뿌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거나, 혹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건네신다는 뜻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일부러 좋은 땅이 아닌, 돌밭,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시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의 말씀, 즉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새들이 와서 그 씨를 먹거나, 뜨거운 햇볕에 말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예언자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것일까요? 아무런 결과도 예상할 수 없는 곳에 노력을 기울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눈에는, 돌밭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도, 가시덤불을 가득 지닌 사람도, 좋은 땅을 가진 사람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좋은 땅을 가진 사람에게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돌밭을 지닌 사람에게서 서른 배까지는 아닐지라도, 수확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 마음이 돌처럼 굳은 사람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와 하느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마음을 닫고 살아가면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기에 신앙의 어려움이 오고,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생길 때, 쉽게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아니 신앙으로 인해 오는 어려움 때문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돌밭이라고 느껴질 때, 내 마음이 굳어 있고, 내 영혼이 지쳐 있다고 생각될 때, 그 마음의 돌밭을 갈아엎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웃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말씀은 내 안에 들어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끊임없는 초대에 응답하면서, 내 마음 안의 욕심의 돌, 미움의 돌들을 치워갈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아니 그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오늘 복음의 사도들이 느꼈던 행복,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듣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닫혔던 문을 하느님께 활짝 열어 드리는 그런 한 주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