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목은 주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고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지요.
영화와 관련하여 얘기하면 예고편이지요.
저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사람이기에
예고편에 대한 정통한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고편은 본편을 꼭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 예고편을 본 사람은 그 영화를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만일 예고편을 보고도 본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본편을 잘못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예고편을 잘못 만든 것일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편은
실패한 예고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실패한 예고편.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는 실패한 예고편입니다.
먼저 예고를 한 바가 있고 이번에 두 번째인데도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는 영 관심이 없고
1차 때보다 한 술 더 떠 누가 더 높으냐는 싸움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저 예고가 아니라 가르침이었습니다.
복음을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죽을 것이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고편에 제자들이 관심이 없었다면
주님께서 예고편을 잘못 만들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가르치셨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본편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고편은 보고 싶으면 보라는 것이지만
가르침은 가르치는 대로 꼭 하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수난, 죽음과 부활의 길을 예고하시며
너희도 같이 가고 싶으면 가자고 유혹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너희는 같이 가야 한다고 가르치며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 예고도 가르침도 실패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것은 예고도 가르침도 다 거부하고
자기들이 시나리오를 다시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나리오입니까?
눈물과 슬픔의 Happy Ending이 아닌
고통과 슬픔은 싹 빼고 즐겁고 기쁘기만 한 시나리오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와 좌절은 없고 승승장구하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이 바뀝니다.
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님이 주인공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주인공의 그 길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과 함께 가려던 주님의 시나리오는 실패하고,
그래서 구원의 시나리오도 일단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고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본편이 실패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주님의 예고편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적어도 잘못 만들어진 예고편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모든 실패를 예상하셨고 그래서 각오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예고편은 제자들에게 성공에 헛물을 켜지 말라는 것이었고,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수난과 죽음을 각오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다른 복음과 달리 분명히 얘기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다고.
성공 착각하지 말고 수난 각오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그런데 오늘 이 아침, 자문해봅니다.
우리도 우리 시나리오를 따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을 주인공에서 빼버린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화려하게 주인공을 하면서 주님은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