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축일은 성 베드로 사도의 축일이 아닙니다.
성 베드로 개인의 축일이 아니라
제도 교회의 책임자인 모든 교황들의 축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축일인 셈이지요.
가톨릭교회에서 의자는 교회 책임자의 자리이고 권위를 뜻하지요.
그래서 사도좌에 앉지 않은 베드로는 개인으로서의 베드로이지만
사도좌에 않게 되면 베드로는 교황으로서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용상龍床이라는 것이 있는데
임금이 되면 용상에 오르게 되며, 임금만 이 용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이 용상은 아무나 앉아서는 안 되는 임금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임금도 이 용상에는 아무 때나, 예를 들어 술 먹을 때, 앉는 게 아니고
만조백관과 함께 정사를 살필 때 앉는 것이니
용상은 권위와 함께 정사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자리이기도 하지요.
이런 면에서 사도좌는 용상과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정말 용상과 사도좌의 차이점은 없는 것일까요?
당연이 있고, 또 있어야겠지요.
이 사도좌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자리입니다.
이것은 용상이 임금이 차지한 자리인데 비해
사도좌는 교황이 차지한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다고 백성이 뽑아 앉게 된 자리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교황의 선출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점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는 것을 보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가 등장할 때 레오 13세가 교황이 된 것,
과도기적인 교황으로 늙은 나이에 뽑혔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문을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젖힌 요한 23세가 교황이 된 것,
공산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공산권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된 것,
신자유시대가 극에 달한 이때 제 3세계 출신의 프란치스코가 교황이 된 것,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생각을 넘어 하느님께서 다 시대에 맞게 하신 거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이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는 어떤 베드로인가 하면 살과 피의 베드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주시고, 일러주시는 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러니 교황은 제 마음대로 하는 폭군과 달라야 하고,
백성의 소리를 잘 듣고 하는 선왕과도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의 소리 중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식별하고,
그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무엇이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님 교회의 반석인 이유는
그의 살과 피, 곧 혈통이 왕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혈통이 신족神族이기 때문이고,
그의 심성이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수없이 흔들리지만
붙들어주십사고 주님께 청하고 주님께서 그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 빠진 베드로의 얘기가 이를 잘 얘기해줍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베드로를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구해주시는 얘기도 마태오복음에만 나오고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는 얘기도 마태오복음에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성마른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실 것을 그저 기다리지 못하고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주님께 달려가고픈 열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풍랑이 거세게 이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이 생겨 물에 빠집니다.
이때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주님께 청하고
주님께서는 손을 뻗어 베드로를 구해주십니다.
이는 베드로의 교회는 얼마든지 세상의 풍파에 흔들릴 수 있지만
주님께서 이 교회를 붙들어주신다는 점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고
교황과 교회는 주님께 언제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함이겠지요.
성 베드로의 사도좌 축일인 오늘,
우리 모두 교황과 우리 교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오늘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