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는지 물으십니다. 이어서 제자들 자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도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며 그 말씀을 명백히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제자 입장에서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가려고 하는 스승님을 만류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하면서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하신 말씀 중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은 예수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오늘 복음 내용에서 핵심적인 두 낱말 ‘반드시’와 ‘명백히’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부활을 위해서는 수난과 죽음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니로 기도하러 가셔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도 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시며 그러한 고통의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 기도하셨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울부짖기도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과정이 두렵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백히’라는 낱말들에서 예수님의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가르치시면서 그 말씀을 ‘명백히’ 하시는 모습이야말로, 마주하기 싫어 피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그 순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당신 의지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순종의 교훈은 사부님 글과 권고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2첼라노 제2부 112장 ‘참되게 순종하는 자, 그리고 순종의 세 종류’ 내용을 형제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부님께서 동료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어떤 순종이 완벽한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이에 사부님께서는 참되게 순종하는 자를 시신에 비유해서 묘사하며 답하십니다.
“움직이게 해도 저항하지 않고, 그 위치에 대해 투덜거리지도 않으며, 다시 자리를 옮겨도 울부짖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좌에 앉히면 올려다보지를 않고 내려다봅니다. 자줏빛 옷을 입히면 두 배 정도는 더 창백해 보입니다. 이동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어디에 놓이든 관심이 없으며, 다른 곳으로 바꿔 달라고 고집스럽게 말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올라가도 자기의 습관된 겸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공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더욱 하찮게 여깁니다.”
사부님께서는 시신에 비유하셨지만, 이러한 순종이 꼭 시신에 비유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우리도 곱씹어 보아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로 명령된 일뿐만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까지 따르는 것, 또한 시킨 것만이 아니라 바라는 것까지 하는 것이 참다운 순종이라고 가르치셨죠. 어찌 보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열정과 의욕을 갖고 생활하는 것 또한 참다운 순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