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찾아와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 축일을 성 바오로의 개종 축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온 것을 기념하는 뜻이었지요.
그렇다면 개종 축일을 회심 축일로 바꾼 것은 어떤 뜻일까요?
아마 유대교와의 대화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도 있지만 다른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무릇 모든 축일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사도 바오로에게서 개종을 배울 것이 아니라
그의 회심을 배워야 한다는 뜻에서 회심축일이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제 임의로 이 축일의 이름을 바꿀까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눈 뜬 축일 또는 성 바오로의 개안 축일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무엇에 눈을 뜨고, 무엇을 보게 된 것일까요?
죽이는데 자신이 가담했던 스테파노가 봤던 것을 보게 된 겁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고,
열린 하늘로 예수께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눈이 뜨인 것이고,
성령의 눈으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본 것이며,
열려있는 하늘로 예수님께서 계신 것을 본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고,
풀어 얘기하면 자신이 그렇게 박해했음에도 주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이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바오로 사도는 사랑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기 전의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며
이래라저래라 명령, 계명만 내리시는 하느님이셨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살려주고 안 지키면 벌하시는
엄하시기만 한 하느님, 심하게 얘기하면 조폭 두목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더 이상 그런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정말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
당신을 위한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당신으로 계시는 하느님,
벌로써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
당신을 박해한 사람까지 용서하여 당신 사도로 만드시는 주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아직 눈 뜨지 않았으면 회심치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정작 사랑치 않고 하느님의 계명만 그저 열심히 지키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은 없고 계명만 있는 사람도 아직 회심치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아직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의 선포자가 되지 않았다면
이웃의 구원을 위해 조금도 나를 내줄 마음이 되어 있지 않다면
이 역시 우리는 회심하지 않은 것이거나 회심자가 아직 덜 된 것입니다.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이 축일을 정말 제대로 지낸다면
사랑의 회심자가 되고,
사랑에로 회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